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 김경재
역자 후기
고국과 타국 사이에서
타국 땅에서 이 자화상(self-portrait)을 그리는 것도 모든 참다운 운명이 그러하듯이 동시에 자유를 뜻하는 한 운명이다. 고국과 타국 사이의 경계선은 자연과 역사가 그어놓은 단순한 외적 경계선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내적인 두 힘, 인간 실존의 두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인 바 그것의 고전적 형식은 저 아브라함이 받은 명령이다. "너의 집 …… 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약속 때문에 그의 본토와 가족, 종파의 공동체, 그의 백성과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본토와 가족, 종파의 공동체, 그의 백성과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복종을 요구하는 신은 타국의 신이며 이교적 신들처럼 어느 지역에 매인 신이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을 축복한다는 역사의 신이다. 예언자와 예수의 신이기도 한 이 신은 모든 종교적 민족주의 - 그가 끊임없이 반대한 것이며 이교도들의 것이며 또 아브라함에 대한 명령에서 거부된 것이기도 한 유대 민족주의 - 를 철저하게 좌절시킨다. 어떠한 고백 그리스도교에서도 이 명령의 의미를 논박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자신의 나라를 떠나 그에게 지시될 땅으로 가야만 한다. 그는 순전히 초월적인 한 약속을 믿어야만 한다.
"본토"의 참 뜻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그의 출생지일 수도 있고 그의 국가공동체일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 이민"이 대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로부터 떠나라는 명령은 지배적 권위와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양식과 결별하고 그런 것들에 피동적으로든 능동적으로든 저항하라는 요구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태도이기도 했던 "정신적 이민"에의 요구다. 타국 땅으로 가는 것은 또한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내적인 무엇을 의미하기도 하고 믿고 생각하는 종래의 노선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분명해 보이는 것의 한계선을 넘어서 밀고 나가는 것이나 새롭고도 미지의 길을 열어 젖히는 뜨거운 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니이체적 표현으로 하자면 그것은 "우리 자녀들의 땅"에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땅"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간적 이민이며 지리학적 이민이 아니다. 낯선 땅은 미래 가운데에 놓여 있으며 "현재를 넘어선" 나라다. 그리고 우리가 이 낯선 타국 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도 친근한 것마저도 낯설음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인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실존주의가 인간 유한성의 표현으로서 채택한 바의 것이기도 한 세계 속에서 오직 홀로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체험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볼 때 나는 항상 고국과 낯선 타국 사이에 서 있다. 나는 결코 외국에 대해 배타적으로 결정한 적은 없었으며 "이민"의 두 양태를 모두 경험했다. 나는 실제로 내가 고국을 떠나기 훨씬 전부터 개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미 한 "이주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산천경계나 언어, 전통, 역사적 운명의 공유성으로 보나 조국의 땅에 내가 뿌리박고 있는 것은 항상 너무나 본능적이어서 나는 왜 그것이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민교육에 있어서나 지적 창출에 있어서 문화적 민족주의를 과대하게 강조하는 것은 민족적 단결에 대한 불안정의 한 표현이다. 나는 이 같은 과대강조가 경계선(외적이거나 내적이거나)으로부터 밀려온 개인들과 자기자신과 남들에게 스스로의 애국심을 합리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박적으로 느끼게 개인들 가운데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 또한 경계선에로 되돌아가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면서부터 항상 독일인임을 철저히 느껴왔기 때문에 충분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처할 수 없었다. 출생과 운명의 조건을 제대로 물어볼 수 없었다. 우리는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주어진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사회와 정치를 평가하고 지적, 도덕적 수양과 문화적, 사회적 삶을 평가하는 척도인가? 그 환경에 태어난 것은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그 까닭은 물음이 그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전제들이 대답으로 그릇되게 취급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의 악순환 속에 갇혀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인 바, 그 악순환이란 우리의 민족적 본질의 힘에 대한 확신의 결여로 판명되어 언젠가는 민족적 삶의 무서운 공허성으로 끝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족적 감정으로 칭송되고 있는 그것이다. 나는 그 같은 민족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대를 나의 프랑크푸르트 공개교육 강좌 "사회교육(Socialpadagogik)"에서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족주의의 문제는 주로 경제적 정치적 문제다. 나는 그것에 대해 변화된 태도를 보여왔다. 전체주의 국가와 교회의 요구에 관한 한 항목에서 나는 유럽에 있어서의 군사적 전체주의의 원인과 그것이 자본주의의 붕괴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논하였다. 나의 글 "힘의 문제(Das problem der Macht)"는 힘의 의미와 한계를 그것이 존재에 대한 일반적 물음, 곧 존재론에 관련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주의적 결단"에서 나는 민족주의의 인류학적 뿌리와 정치적 결과를 들춰내어 보이고자 했다. 1차 대전의 경험은 나의 입장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적 힘에의 의지가 가진 악마적이고도 파괴적인 성격을 드러내었는데 특히 그들의 민족적 원인을 가진 정의 가운데에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전쟁에 열광적으로 뛰어들었던 자들에게 그러했다. 비록 결과적으로 민족주의가 불가피하다고 느끼고는 있지만 (혹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는 유럽 민족주의를 유럽의 비극적 자기파괴의 도구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결코 나를 엄격한 의미의 평화주의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평화주의의 어떤 형태는 그 대표자들의 나약한 성격 때문에 내게는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승리의 개가를 올려서 만족에 빠진 국가들이 제창하는 류의 평화주의는 이데올로기적이고도 위선적인 오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국가들의 평화주의는 정직하기에는 너무 실리적이기 때문이다. 형식적 평화주의는 그 의도와는 반대되는 결과로 끝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계에서는 국제평화뿐만 아니라 국내평화까지도 평화를 교란하는 자를 통제하는 힘에 달려있다. 나는 민족적 힘에의 의지를 정당화시키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 배후에 인류의 자기파멸을 막을 수 있는 힘이 틀림없이 있는, 내적 연관을 가진 그 어떤 세력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오늘날 "인류"라는 이념은 공허한 표현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은 경제적, 정치적 현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세계의 어느 부분의 운명은 다른 어떤 부분의 운명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류 통일에 대한 날로 커가는 인식은 말하자면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이 속하게 되는 신의 나라에 대한 믿음에 담긴 진리를 표출하고 또 고대한다. 인류 통일을 목표로 삼는 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고로 신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가 지금 살고 있고, 미국인의 호의를 입고 있는 이 신대륙의 경계선에서 비극적 자기분할에 빠진 유럽의 영상보다는 하나의 인류라는 영상에 더 가까운 한 이상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행복했다. 그것은 모든 국가와 민족의 대표자들이 그 시민이 되어 살 수 있는 하나의 국가라는 영상이다. 비록 여기에서도 이상과 현실의 간격은 무한히 깊고 그 영상은 때때로 어두운 그늘 속에 가리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것은 "인류"라고 불리는 역사의 최고의 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며 또한 그 자체가 현실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 - 신의 나라 - 인 것이다. 그 최고의 가능성 속에서 고국과 타국 사이의 경계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회고 : 경계선과 제한
정신적 물질적인 인간 실존의 많은 가능한 양태들이 이 책에서 논의되었다. 어떤 것들은 내 전기의 한 부분이면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도 있다. 또 상당한 부분은 나의 생애와 사상의 줄거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취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논의한 각각의 가능한 양태를 나는 다른 가능성과의 관계, 즉 그들이 서로 대립되는 길이자 서로 상관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한 관계성 속에서 논의해 왔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으로서의 삶의 각각의 가능성들은 저절로 경계선에로 흘러들며 또 그 경계선을 넘어 그 가능성들을 제한하고 있던 무엇과 만나게 되는 곳으로 흘러들게 된다. 많은 경계선 위에 서있는 사람은 동요와 불안정과 갖가지 실존의 내적 제한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평화와 안정과 완성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사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서 왜 내가 열거한 경험과 생각들이 결국 단편적이고 임시적일 뿐인지를 잘 말해준다. 이런 생각들에 명확한 형태를 주고자 한 나의 열망은 내가 신대륙의 풍토 위에 던져졌다는 경계선적 운명에 의해 다시 한 번 꺾어지고 말았다. 그 같은 일을 최선을 다해 완수할 수 있을 것인지는 나이 50이 가까워지자 더욱 불확실한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이 성취되든 안 되든 인간의 행위의 경계선 - 이제 더 이상 두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 곧 영원의 손길에 의해 모든 유한한 것 위에 내려진 제한 - 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영원, 그것의 앞에서는 우리 존재의 한복판마저도 단지 한 변두리이며 우리들의 성취의 최고의 수준까지도 한 조각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국내에 번역된 틸리히의 다른 번역서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궁극적 관심 : 현대총서
문화의 신학 : 현대총서
(현대의) 종교적 상황 : 전망신서
새로운 존재 : 현대신서
종교란 무엇인가? : 전망사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 한국신학연구소
그리스도교 사상사 : 한국신학연구소
문화와 종교 : 전망사
기독교와 세계종교 : 현대신서
조직신학 : 성광문화사
'━━ 영성을 위한 ━━ > 기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은 왜 배워야 하는가? - 오철환 (0) | 2022.10.27 |
---|---|
성경은 왜 배워야 하는가? - 글/ 오철환. (0) | 2022.10.26 |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 김경재 (0) | 2022.10.24 |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 김경재 (0) | 2022.10.22 |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 김경재 (0) | 2022.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