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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어페어6 - 무라카미 하루키.

Joyfule 2011. 1. 12. 12:05

패밀리 어페어6 - 무라카미 하루키.


여동생이 하는 말에도 일리는 있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나는 확실히 아주 자연스럽게 와타나베 노보루와 동석할 기회를 피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와타나베 노보루와 나 사이에는
그다지 공통된 화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동시 통역을 대동하고 농담을 하는 것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부탁이에요. 하루면 되니까 그렇게 해줘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여름이 끝날 때까지 오빠의 성생활에 대해 훼방놓지 않을 테니까."
"내 성생활이란 아주 사소한 거야. 여름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를 정도라구."
"아무튼 이번 일요일에는 집에 있어 주는 거죠?"
"별 수 없군."하고 나는 체념하면서 말했다.
"모르긴 해도 그가 오디오를 수리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 사람 그런 거 정말 특기라니까요."
"손가락 놀림이 특기겠지."
"이상한 생각좀 작작하라구요."하고 여동생은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나는 넥타이를 매고 회사로 나갔다.

그 주일 동안 줄창 맑은 날씨였다. 매일매일이 한결같았다.
수요일 저녁에 나는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이 바빠서 이번 주말에도 만나기 어렵겠다고 했다.
내가 벌써 3주일 동안이나 그녀와 만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일요일에 데이트했던 여대생 집에 전화를 돌렸는데,
그녀는 없었다. 목요일에도 금요일에도 그녀는 집에 없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8시에 여동생 등쌀에 일어났다.

"시트를 빨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예요."하고 동생이 말했다.
그리고 시트와 베갯잇을 벗기고 파자마를 벗겼다.
나는 갈 것이 없어서 샤워장으로 들어가 수염을 깎았다.
저것도 차츰 어머니를 닮아 가는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란 마치 연어와 같다.
뭐니뭐니해도 다들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샤워실에서 나온 후 나는 반바지를 입고,
색이 바래서 거의 글씨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티셔츠를 뒤집어써서 입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오렌지 쥬스를 마셨다.
몸속에는 아직도 어젯밤의 알코올이 얼마만큼 남아 있었다.
신문을 펼쳐 보고 싶지도 않았다.
식탁 위에 크래커 상자가 있기에,
나는 그것을 서너 개 먹고는 아침 식사 대용으로 때웠다.

여동생은 시트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고, 그 동안에 내 방과 자기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걸 끝내자 세제를 풀어 거실과 주방의 바닥과 벽을 걸레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줄곧 거실 소파에 누워서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 준
'허슬러'의 누드 사진을 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성기는 참으로 여러 가지 크기와 형태가 있다.
키의 크기랑 지능 지수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있잖아요, 거기서 뒹굴지 말고 시장 좀 봐다 줄래요?"하고
여동생이 가득 적어 놓은 메모지를 내게로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책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춰 두라구요. 깔끔한 사람이니까."
나는 '허슬러'를 탁자 위에 놓고 메모지를 노려보았다.

레터스, 토마토, 샐러리, 프렌치 드레싱, 스모크 서먼,
마스터드, 양파, 수프 스톡, 감자, 파슬리, 스테이크 고기 세 조각...
"스테이크 고기? 난 어제도 스테이크를 먹었다구.
스테이크는 싫어. 크로켓으로 하는 게 좋아."

"오빠는 어제 스테이크를 먹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먹지 않았어요. 고집 좀 부리지 마세요.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놓고, 크로켓을 내놓을 수는 없잖아요?"
"난 여자아이 집에 초대받아 가서 금새 튀긴 크로켓이 나온다면 감동하고 말텐데 말이야.
가늘게 채썰은 하얀 양배추를 수북하게 담아 곁들이고
바지락 조개 된장국이 있고... 생활이란 그런 거라구."

"하지만 오늘은 아무튼 스테이크로 정했어요.
크로켓 정도야 앞으로 죽도록 먹여 줄 테니까,
오늘은 군소리 작작하고 꾹 참고 스테이크를 먹으라구요. 제발 부탁이에요."
"좋습니다요."하고 나는 순순히 따라 주었다.
나는 이러고저러고 군소리는 하지만 결국엔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이다.

나는 가까운 슈퍼마켓으로 가서 메모되어 있는 모든 물건을 하고,
술 가게에 들로 4,500엔 짜리 샤브리를 샀다.
나는 약혼한 두 사람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샤브리를 선물할 셈이었다.
그런 것으로나 친절한 사람이 될 수밖에.
집에 돌아오자 침대 위에는 랄프 로렌의
블루 폴로셔츠와 얼룩하나 없는 베이지색 면바지가 놓여 있었다.
"그걸로 갈아 입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생각했지만 군소리 않고 갈아입었다.
뭐라고 말해 봤자, 평소의 따스하고 지저분하고 평화로운 휴일이
쟁반 위에 담겨져 돌아올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와타나베 노보루는 3시에 찾아왔다.
물론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산들바람과 함께 찾아왔다.
그의 혼다 500cc의 퍽퍽 거리는 불길한 배기음은
5백미터 앞에서부터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베란다에서 머리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가 아파트 현관 앞에다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헬멧을 벗는 것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STP의 스티커가 붙어 있는 헬멧만 빼놓고,
오늘은 지극히 보통 사람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풀을 빳빳하게 먹인 체크 무늬의 앞 트인 셔츠에다,
통 넓은 하얀 바지, 술 장식이 붙어 있는 갈색 로퍼 슈즈의 모양새였다.
구두와 벨트색이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낚시 전시회의 친구가 온 것 같애."하고
나는 부엌에서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그럼 잠시만 오빠가 얘기를 나눠줄래요?
나는 저녁을 준비할 테니까."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걸. 무슨 말을 할지 모르잖아.
내가 식사 준비를 해줄게. 너의 둘이서 이야기하면 어때?"
"바보 소리 좀 그만해요.
그런 짓을 했다가는 꼴이 말이 아니잖아요. 오빠가 앉아 있어야 해요."

벨이 울려 문을 열자, 거기 와타나베 노보루가 서 있었다.
나는 그를 거실로 맞아 들이고, 소파에 앉게 했다.
그는 선물로 서틴원 아이스크림을 들고 왔는데,
우리 냉장고에는 좁은데다가 냉동 식품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그것을 집어넣는데 몹시 애를 먹었다.
정말로 귀찮게 구는 녀석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고많은 중에 아이스크림 따위를 사들고 오냐 말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맥주를 마시지 않겠냐고 권했다.
안 마신다고 그는 대답했다.
"체질상 술을 못합니다.
맥주 한잔만 마셔도 기분이 좋지 않을 정도라서요."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학생 시절에 친구들하고 내기를 해서
큰 사발 가득하게 맥주를 마신 적이 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물었다.
"꼬박 이틀동안 소변이 맥주였어. 덕분에 트림이..."
"저어. 이럴 때 오디오 수리를 부탁하면 어떨까요?"하고
여동생이 불길한 연기 냄새라도 맡듯이 다가와
오렌지 쥬스 두 잔을 탁자 위에 놓으면서 말참견을 했다.
"좋지요."하고 그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