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무지개 - 홍미숙
보슬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풍경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다. 고향 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해도 되고, 39번 국도를 이용해도 된다. 그리고 옛길로만 갈수도 있다. 오늘은 옛길을 택했다.
몇 년 전만해도 고향 가는 길은 옛길 하나였다. 옛길은 여러 읍내를 통과하였다. 구경할 게 많아서 좋았다. 지금은 그 읍내들이 도시로 변해 추억 속에서나 예전의 읍내 풍경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옛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옛길은 나를 세상과 소통하게 해준 길이다. 고향집에서 읍내까지는 6킬로미터를 나와야 했다. 다른 고장을 가려면 어김없이 읍내 차부를 거쳐야했다. 버스표를 그곳에서 사야만 서울이든 수원이든 갈 수 있었다. 고향에는 서울과 수원을 오가는 시외버스만 있었다. 고속버스나 기차는 구경할 수도 없었다. 나는 방학 때면 고향을 오가는 버스를 타고 수원 외가나 서울 고모, 이모 댁을 갔다. 중학교 수학여행을 가기 전까지는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읍내에는 고향마을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가득 했다. 구경하는 자체만 해도 즐거웠다. 신기한 게 많아 두리번대느라 할머니 시야에서 멀어진 적도 많았다. 읍내에 나와야 2층 건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중 · 고등학교도 읍내에만 있었다. 초등학교도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규모하고는 댈 게 아니었다. 나는 읍내에서 시장 구경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은 신바람 나는 날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읍내 나들이를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날은 난전도 서기 때문에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다.
서점도 읍내에만 있었다. 다른 가게들에 비해 서점은 컸다. 문구도 함께 팔았다. 그 시절에는 책도 흔치않았지만 학용품도 귀했다. 학창시절 내내 펜촉에 잉크를 찍어가며 필기를 했다. 볼펜이나 샤프펜슬 같은 게 나오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연필을 쓰다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만년필이나 펜촉을 이용해 글을 썼다. 잉크를 수도 없이 엎지르면서 학교생활을 했다. 가방이나 옷에 잉크물이 안 든 친구들이 없었다. 그래도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점에 자주 갔다. 책 구경만 해도 즐거웠고, 학용품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학생들로 서점 안은 항상 붐볐다. 그런데 요즘은 예전보다 그 서점의 규모가 작아졌다. 주변에 대형 서점이 없는데도 그렇다. 인구는 많이 늘었는데 여간 서운한 게 아니다. 면 소재지였던 고향이 시청 소재지가 되었으니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올망졸망 모여 있었던 옛 시장의 가게들은 모두 대형 마트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옛 추억을 더듬기조차 힘들어졌다.
어느새 고향 읍내를 지나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보슬비도 그치고 안개도 걷혔다. 차창을 활짝 열고 심호흡을 크게 해 보았다. 코 가지고 모자라 입까지 동원했다. 고향 냄새가 온 몸으로 스며든다. 신선한 공기가 자동차 안으로 잽싸게 들어와 내 볼을 비비며 난리다. 내 몸이 갑자기 싱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길섶에 여름내 피었던 개망초꽃과 달맞이꽃이 시들해 보인다. 그 대신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초가을 바람에 살랑댄다. 머지않아 들국화들이 여기저기에서 피어날 것으로 보인다. 하늘도 높아지고 푸르러갈 것이다.
고향 길에는 백로도 날고 산새들도 재잘댄다. 내가 수없이 밟고 다녔던 고향 길은 언제 만나도 정겹다. 아쉬운 것은 구불구불 산길이 일직선으로 바뀐 것이다. 나와 눈 맞춤을 하고 생각을 나누던 산길이 사라져버렸다.
고향집이 가까워지니 지난날의 추억이 여기저기에서 달려와 나를 맞이한다. 어느 것과 먼저 추억을 이야기해야할 지 모르겠다. 반가움에 마음만 설렌다. 내가 태어나게 되었고, 내가 만들어진 고향마을이다. 산과 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그 중 고향 하늘을 유난히 좋아했다.
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내 꿈이 자랐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낙으로 알고 지냈다. 해와 달, 별과 구름, 은하수까지 매일매일 친구했다. 그리고 새들의 군무도 가슴 벅차게 해주었다.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해외 나들이가 쉽지 않아 여객기는 보지 못했다. 고향이 수원 비행장과 그리 멀지 않아서인지, 서부전선과 가까워서인지 군용 제트기가 자주 날아다녔을 뿐이었다. 비행선을 그리면서 높이 날았다. 그런 비행기를 보는 것도 신기했고 기뻤다. 요즘은 군용 제트기 외에 각종 여객기의 모습을 고향하늘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인천국제공항과 고향이 멀지 않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나의 꿈을 키우는데 큰 몫을 해주었다. 고향의 모든 것들이 새삼 고맙다.
이런 저런 추억과 만나는 동안 자동차는 고향집 마당에 닿았다. 오늘의 기사는 대학생인 아들아이다. 비는 이미 그쳐있었다. 운전을 하고 나를 고향에 데려다 준 아들아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반가운 목소리로 “엄마, 무지개 떴어요.”하고 외친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동쪽 하늘을 보았다. 갑자기 감동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가슴이 벅차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적절할 것 같았다. 고향하늘에 뜬 무지개를 어려서 보고 어른 되어서는 처음이었다.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너무 기뻤다. 이런 행운이 아들아이와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나도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무지개 떴어요.” 아들아이가 내게 한 말을 어머니께 똑같이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무지개보다 우리 모자를 더 반갑게 맞아주셨다.
고향 마을은 무지개가 자주 뜨는 마을이다. 내가 어렸을 때도 비가 그치고 해질 무렵이 되면 동쪽 하늘에 무지개가 뜨곤 했다. 무지개는 앞산과 뒷산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곤 했다. 고향에서 살아있는 홍예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 그 홍예다리가 앞산과 뒷산을 연결해 놓은 게 아니었다. 오늘은 고향마을 안으로 무지개가 들어왔다. 그렇게 영롱한 빛을 띤 무지개는 처음이었다. 너무나 선명했다. 무지개에서 광채가 났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동안 반원에 가까운 무지개만 만났는데 고향마을 안으로 들어온 무지개는 원에 가까웠다.
나는 아들아이와 함께 무지개와의 만남을 한참동안 가졌다. 고향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잊은 채 마당에 서서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나를 키워준 고향 마을이 내게 큰 선물을 주면서 반겼다. 고향을 위해 내가 한 일이 없는데 고향은 여전히 나에게 베풀기만 한다. 그야말로 “황공무지(惶恐無地)로소이다.”였다.
오늘은 어머니보다 무지개가 먼저 마중을 나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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