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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선교사 알렌

Joyfule 2008. 3. 24. 00:53


알렌 (Horace N.Allen,安 運)은 미국 북장로회 외지선교부의 의료선교사로서

1883년 중국에 도착하여 상하이에 남경 등지를  왕래하면서 선교에 종사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돌료선교사인 헨델슨으로부터 한국에 가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타진을 받았다.

헨델슨은 한국 정부의 외교관으로 있는 몰렌돌프 (Mollendorf,)와 가까운 사이여서 한국에 관한 사정을 잘알고 있었다.

조심성이 많은 알렌은 그뜻에 응락하면서도 확답을 아니하고 한국 제물포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핫스 (Joseph Hass)에게 의사가 필요한지의 여부를 문의하였다.

그후 뜻을 정한 알렌은 1884년 6월 8일 선교본부를 향해 한국을 위한  선교사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7월 22일 선교회부터 허락을 받았다.


때마침 알렌은 미국을 시찰하고 귀국하는 민영익일행을 만나게 되어,
알렌은 그들을 통하여 한국의 사정을 더 잘알게 되었으며 한국선교를 위한 결심을 완전히 굳혔다.

알렌의 한국행을 위해 많이 애쓴 사람은 몰렌돌프이다.

몰렌돌프는 한국정부에 알렌을 소개하였고 그  이후에도 알렌의 선교 활동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알렌은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 상륙하였다.

그는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신분으로 일하게되었고 영국, 중국, 일본 영사관의 공의도 겸하게 되었다.

그는 몰렌돌프의 호의에 보답하려는 뜻에서 제물포 세관의촉 착의사 직도 겸임하였다

알렌은 의사의 일만해도 바쁜  시간이었지만 한국어의 학습을 위해 열심이었으며

매일 기도와 예배드리는 일을 규칙적으로 시행하여 신앙 생활에 아주 충실하였다.

 (L.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P.90)

이와같이 알렌은 선교가 아직 정식으로 허락되지 않은 한국에 와서

선교사업을 의료사업부터 발족케 하였으며, 그는 한국에 주재하는 최초의 선교사로서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알렌이 10월 1일 미국 선교회 본부에 발송한 보고문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가 이곳에 온지 2주간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로서의 공식 활동이 허락되지 아니하여 공사관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원 장래에 선교의문이 열릴 것이라 믿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H.A.Rhodos, Letters form Korea, 1884,The Korea Mission Field No,4.April 1935, P.78)


알렌은 무엇을 하던지 복음전도의 본신사명을 결코 잊지 아니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한국어 교사인 이하영에게 비밀히 전도하였다.
(Allen D. Cllark,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P 40)
어느사이에 알렌이 기독교 선교사라는 소문이 고종의 귀에 들어갔다.
고종은 푸우트 미국공사를 불러 이의 진부를 타진하였다.

푸우트 공사는 [알렌은 공사관 소속의 틀림없는 의사]라고 답변했다는 이야기이다.

(Allen Papers, Allen`s Letter to F.F.Ellinwood, Seoul Oc- t 8. 1884)


알렌 의사는 환경과 배경이 좋았던 것이 그의 사업 진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정부로부터 신임받고 있는 몰렌돌프가 그의후견인이 었고

그의 본국인 미국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한국에 침략 야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한국에 위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나가는 부동항을 얻으려고 혈안이이었으며

영국도 세계제패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광분하고 있었다.

다만 미국의 극동정책은 필리핀을 지키기 위하여 아시아 각국과 우호를 지키면서,

그것만으로 만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고로 한국인이 가진 미국공사나 관리에 대한 신임도는 상당히 높았다.


알렌은 의료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복음전달의 기회를 포착하고자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교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일련의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이 곧 유명한  갑신정변 이다.
알렌의 선교사업 전개를 위하여 그의 위치를 유리하게 이끈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것은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을 말한다.

개화파의 주요인물인 박영효, 김옥균,서광봄,홍영식 등은 신흥국가 일본의 새 문물을 도입하여

고루한 종래의 제도를 고쳐 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혁신적 기운으로 꽉차 있었다.

그러나 그들앞에는 보수세력이 도사리고 있어 혁신을 방해함으로 일이 진척되지 아니하였다.

그런고로 이를 일거에 제거하여 성사를 기하고자 일으킨 것이 갑신정변 쿠데타이었다.
거사는 우정국 낙성식의 축하연을 이용하여 요로 대관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자객을 통해 대상을 살해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날밤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불이야]하는 소리에 장내가 수라장이 되었다.

민비의 조카인 보수 세력의 거두 민영익은 몸에 7군데나 칼을 맞고 쓸어졌다.
그는 동맥이 끊기는 중상을 입어 출혈이 심하여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장안에서 유명하다는 한의들을 14명이나 불려들여 출혈을 막으려시도하였으나 효력을 보지못하였다.


몰렌돌프는 민영익을 자기 공관으로 옮긴다면 알렌을 불러 응급수술을 가하게 하였다.

알렌은 밤을 새가며 수술을 하여 바늘질한 상처만도 27 처의 중상이었으나 일단 출혈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알렌은 계속하여 3개월동안을 민영익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정성을 다해 치료하여

그의 생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갑신정변 직후 시국은 너무나 불안하여 신변의 위험을 느낀 외국인들은 모두가 인천으로 피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알렌은 환자 남아 있으면서

 [나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며 또 갈 수 있다하여도 가지않게다]라는 비장한 말과 함께

사생결단하고 치료에 임하였던 것이다. (The Foreign Missionary for March,1885,P429)


만약 그의 의술이 실패하게 된다면 조정의 원망과 불평이 일시에 닥쳐 올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민영익은 빨리  회복되었다.

이에 대한 보상은 과연 놀라웠다. 민영익은 알렌 의사에게 일금 10 만량을 감사의 예물로 전달하였으며,

서양 의술의 탁월함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완전히 인정받게되는 행운을 만났다.

궁중의 신임은 한결같이 알렌에게 집중되었으며 마침내 그는 국왕의 시의가 되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거기에다가 고종 국왕이 알렌에게 태극일등훈장을 수여하였음은 더 큰 보상이었다.

(Charles A.Sauer,Whithin the Gate, P97)


알렌 의사의 가슴속에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달하려는 생각으로 꽉차 있었다.

그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국왕에게 병원 설립의 허가를 요청하여 가납되었다.

한국 정부는 한성 북쪽에 있는 홍영식의 저택을 하사하였고

이름도 광혜원 Widespriad Relidf House)이라고 지어주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사형이 집행되어 그의 집은 몰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2월 25일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병원이 개설되고 3월 12일에는

제중원(Univensal Helpfulness House)이라고 개칭을 보았다.


알렌은 중신, 귀족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의 병도 잘 치료하여 환자는 늘어나

어떤날은 하루에 265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병원을  출입하였다.

1885년 4월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내한에 이어 6월에는 헤론 의사가 입국하여 제중원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런던 중 알렌은 1887년 워싱톤 주재 한국공사관의 서기가 되었다.


1895년 8월부터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관리로 봉직하게 되었으며
1897년에는 공사관의 대리공사 그리고 총영사가 되었는가 하면 1901년 하였다.
알렌은 1884년 한국에 도래한 이래로 1905년에 한국을 떠날때까지 20여년을

선교사로, 의사로, 공사로 혹은 대사로 분주히 그리고  눈부시게 활동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한국을 향해 일본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가 겨루고 있는 정치적 압력을 교묘히 헤치면서

한미간의  국교를 두텁게하는데 공헌했으며 또한 미국교회로 하여금

선교의 길을 이땅에서 펴게하여 한국 선교의 출발을 획하게 하는 큰 공헌을 세운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