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3국 공통 상용한자 800자 선언’에 대한 이어령(전 문화부 장관) 중앙일보 고문의 평가다. 이 고문은 과거가 아닌 아시아의 미래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세계의 중심이 아시아로 온다는 건 오래된 이야기다. 앞으로 아시아 경제공동체가 유럽연합(EU)처럼 될지는 몰라도, 아시아의 싱킹 툴(Thinking tool·사고의 도구)로서 알파벳 같은 강력한 문자권 하나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아시아에 강력한 문화적 연대가 생기지 않겠는가. 이건 세계의 축이 아시아로 옮겨 오는 기반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천자문이 있는데 왜 따로 800자가 필요한가.
“옛날에 만든 천자문에는 어려운 글자가 많다. 그런데 ‘봄 춘(春)’ ‘북녘 북(北)’처럼 생활 속에서 아주 흔하게 쓰는 글자는 빠져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용적인 거다. 800자는 다르다. 한·중·일 3국이 실제 자주 쓰는 글자를 뽑았다.”
-‘한·중·일 3국 공통 상용한자’를 선언한 게 한국의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라 했다. 왜 그런가.
“아시아 문화권이라고 할 때는 한·중·일이 들어간다. 그런데 문자를 얘기할 때는 한국이 쏙 빠진다. 중국과 일본은 한국에서 한자를 안 쓰는 줄 안다. 공문서에도 없고, 간판에도 없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북한은 한자를 아예 쓰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을 제쳐놓고 중국과 일본만 한자 문화권을 꾸리려 한다. 그건 곤란하다. 그래서 우리가 3국 공통 상용한자를 먼저 제안한 거다. 한국의 미래 세대가 아시아 문화권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말이다.”
- 한자는 중국의 문자가 아닌가.
“그건 오해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모두 1000년 이상 한자를 가지고 왔다. 한자로 된 문학과 기록물들이 3국의 역사 속에 다 녹아 있다. 유럽을 보라. 알파벳이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 않나. 그렇다고 알파벳이 특정한 나라의 문자인가. 그건 아니다. 알파벳은 유럽의 문자다. 마찬가지다. 한자는 중국의 문자가 아니라 ‘아시아의 문자’다. 10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한자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 어떤 차이가 있나.
“가령 ‘공부(工夫)’는 한국에서 ‘학문을 닦는다’란 의미다. 그런데 중국에선 ‘시간의 틈, 여가’란 뜻이고, 일본에선 ‘아이디어’의 의미로 쓰인다. ‘대장부(大丈夫)’란 단어도 한국과 중국에선 ‘사나이’란 뜻인데, 일본에선 ‘오케이(좋다)’란 의미로 통한다. 한자의 자형도 다르다. 한국은 정자(正字·원래의 한자라는 의미에서 정자라고 부름), 중국은 간자(簡字·획을 줄여 간략화한 한자), 일본은 약자(略字·간략화한 한자)를 쓴다. 그래서 3국이 함께 이해할 수 있는 문자 800자가 있다는 건 대단한 거다. 여기에 웬만한 상용한자는 다 들어간다.”
- 3국 정상회담이 어려울 만큼 외교 관계가 냉랭한 시점에 민간 차원에서 800자 선언이 나왔다.
“강물이 아무리 꽁꽁 얼어붙어도 얼음 아래 섭씨 4도에선 물이 흐른다. 거기에 물고기가 산다. 정치와 경제가 아무리 얼어붙어도 문화는 그런 강물처럼 흐른다. 진태하(인제대) 석좌교수가 마련한 500자 상용한자를 바탕으로 우리가 제안했고, 일본안과 중국안을 합쳐 800자가 된 거다. 이건 미래 지향적인 프로젝트다.”
- 왜 미래 지향적 프로젝트인가.
“앞으로는 아이콘의 시대다. 지금은 인터넷상에서 영어가 80% 이상 사용된다. 그런데 갈수록 한자 문화권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2040~2050년에는 각국 국제공항에 ‘아웃(OUT)’ ‘인(IN)’ 식의 영어뿐만 아니라 ‘출(出)’ ‘입(入)’ 하는 식의 한자로도 표기가 되리라 본다. 한자 자체를 하나의 그래픽 미디어로 끌어들였을 때 표현이 굉장히 풍부해진다. 그동안 우리는 서구 중심의 영어·프랑스어·독일어를 열심히 배웠다. 앞으로는 그에 못지않게 한자가 중요해진다. 그래서 한자는 미래의 문화자원, 문화자본이 되는 거다.”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