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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의 미덕 - 박지원

Joyfule 2013. 10. 22. 08:49

 

호박의 미덕 - 박지원


한산(韓山) 이자후(李子厚)는 나이 마흔여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내아이를 얻었다. 긴 눈썹, 옴폭한 눈, 오똑한 코, 넓은 이마에 총명한 모영은 영락없는 명문세가의 아이였다. 이자후를 축하하는 친척과 벗들이 앞다투어 시를 지어 그 기쁨을 표시하였고, 자후는 이를 지어 긴 두루마리로 만들어 내게 서문을 짓도록 부탁하였다.

 

아! 자후가 바야흐로 자식을 두지 못했을 때였다. 자후와 정이 자별(自別)한 친구와 동료들이 그를 위해 우려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건만 나는 홀로 그에게 반드시 자식이 잇을 것이라 말하였다. 내 일찍이 그와 비록 종유하지는 않았으되 나는 그가 덕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자후를 위해 우려하는 까닭은 그가 늙을 나이가 아님에도 머리카락이 빠지고 이빨이 빠져 구부정한 일개 늙은이가 되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식 잇기에 급급해서라고 여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후는 사람됨이 중후하고 질박하여 말수가 적었다. 진실하고 참되며 화려함이 없으니, 그 마음이 반드시 성실하고 위선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무릇 덕이 흉측함은 불성실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성실하지 못하면 아무런 사물도 없게 된다. 때문에 가을에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흉이라 말한다. 오직 덕만이 능히 그 세계(世系)를 멀리 계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니 《서경》에 “덕을 힘써 행하고 편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초목에 비유해보자. 이미 열매로 맺었다면 마땅히 심을 수 있을 것이다. 심는다는 것은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방도이므로 씨를 인(仁)이라고 말하며, 인이라는 것은 소멸치 않게 하는 방도이므로 종자(種子)라고 일컫는다. 하나의 과실 열매를 미루어서 온갖 이치의 실체를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자후가 아들을 두게 되자 나의 임시 거처가 자후의 마을과 마주보게 되어 날마다 이웃 마을을 따라 자후와 놀았다. 자후의 아이가 태어나서 해를 지나자 어른께 인사하는 법을 익히고, 나이 든 사람을 가리키며 누가 아무개다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보조개 지으며 웃는 모습과 애교있게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하루가 다르게 더욱 예쁘고 사랑스럽게 되니 지난날 자후를 위해 근심하던 이들이 내 말을 믿고 그 이치를 묻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알기 어렵지 않다. 무릇 군자가 저 화려한 꽃을 싫어함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꽃이 크다고 해서 꼭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니 목단과 작약이 그런 것이다. 모과의 꽃은 목련에 미치지 못하고, 연봉오리의 열매는 대추와 밤만 못하다. 호박과 같은 것이 꽃을 가지는 경우에는 더더욱 하잘것없고 품위가 없어 봄날의 뭇 꽃들과 나란히 봄을 장식하거나 요염을 떨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 넝쿨이 뻗어남은 멀고도 길어서 한 덩이 호박이면 한 가정의 끼니를 제공할 수 있고, 한 움큼의 씨이면 백마지기를 덮을 수 있으며, 따 갈라서 바가지를 만든다면 몇 말의 곡식을 담을 수 있으니 도대체 꽃과 열매란 어떠한 관계에 있다 할 것인가?

 

아! 자후는 힘쓸지어다. 자후는 요염하고 기교를 가지거나 화려하고 고와서 지금 세상에 아첨하거나 여러 사람에게 인기를 펼 수 있는 사람은 못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간직한 것이 둥글둥글하고 도타우며, 돈독하고 질박하다면 그 열매는 심을 수 있음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심었음이 이미 두텁다면 그 생육은 의당 더디겠으나 그 뿌리내림은 응당 튼튼할 것이니라.

 

내 어찌 이를 자후의 자식 두는 데에서만 징험할 수 있겠는가? 《시경》에도 “효자는 자손이 끊이지 않을 것이니 영원히 그 무리가 뻗어나리라”했다. 이러한 예로 미루어 그것이 영영세세토록 자손이 끊이지 않음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라. 내가 이제 이것을 글로 써주어서 자후의 집안에 효자가 나고 번성하기를 기다리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