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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추수제(淸秋數題) - 이희승

Joyfule 2013. 10. 28. 09:47

 

 

청추수제(淸秋數題)

이희승                                     

벌레

낮에는 아직 30 몇 도의 더위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는다.

그런데 어느 틈엔지 제일선에 나선 가을의 전령사(傳令使)가 전등빛을 따라와서

그 서늘한 목소리로 노염(老炎)에 지친 심신을 식혀 주고 있다. 

그들은 여치, 베짱이, 그리고 귀뚜라미 등이다.
물론 이 전령사들의 전초역(前哨役)을 맡아 가지고

훨씬 먼저 온 것으로 매미, 쓰르라미가 있지만,

그들은 소란한 대낮에 우거진 녹음 속에서 폭양을 항거하면서 부르는 외침이라

듣는 사람에게 '가을이다' 하는 기분을 부어 주기에는 아직 부족한 무엇이 있었다.
그렇더니 이 저녁에 들리는 정밀(靜謐) 속에 전진하여 오는 소리야말로,

"이젠 확실한 가을이로구나!"하는 영추송(迎秋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들치고 튀어나오게 한다.

 

 

전등을 끄고 자리에 누우니 영창이 유난히 환하다.

가느다란 벌레 소리들이 창밖에 가득 차 흐른다.
"아!"하는 사이에 나는 내 그림자의 발목을 디디고 퇴 아래 마당 가운데 섰다.

쳐다보아도 쳐다보아도 눈도 부시지 않은 수정덩이가

도시의 무수한 전등과 네온 사인에게 나 보아란 듯이 달려 있다.
저 달이 생긴 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이 그를 어루만지고 주무르고 꼬집고 하였을까?

울기는 누구누구며, 웃기는 누구누구? 원망인들 오죽 쌓였을라고.

그의 얼굴은 따뜻한 듯 서늘한 듯 쌀쌀하면서도 다정도 한다.

성결(聖潔)한, 숭고한, 존엄한 그의 위력에 쫓겨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들어왔다.

 

 

   이슬

이슬은 가을 예술의 주옥편이다.

하기야 여름엔들 이슬이 없으랴?

그러나 청랑(晴朗)) 그대로의 이슬은 청랑 그대로의 가을이라야 더욱 청랑하다.
삽상(颯爽)한 가을 아침에 풀잎마다

꿰어진 이슬 방울의 영롱도 표현할 말이 막히거니와,

달빛에 젖고 벌레 노래에 엮어진 그 청신한 진주 떨기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할 뿐이다.

  

  창공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 하나 없구나!

뉘 솜씨로 물들인 깁일러냐?

남(藍)이랄까, 코발트랄까,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듯하구나.
내 언제부터 호수를 사랑하고, 바다를 그리워하며, 대양(大洋)을 동경하였던가?

그러나 내 심장은 저 창공에 조그만 조각배가 되어

한없는 항해를 계속하며 마지않는 알뜰한 이 향연을 이 철마다 누리곤 한다.

   

 독서

'서중자유천종록(書中自有千鍾祿)'이란,

실리주의에 밝은 중국 사람들에게 있을 법한 설법이렷다.

그러나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란 형용이 한푼의 에누리도 없는 삼복 허리에,

만종록(萬鍾祿)이 당장 무릎 위에 떨어진다기로서니,

독서삼매(讀書三昧)에 들어갈 그런 목석연(木石然)한 사람이 있을라고?

너무도 자아류(自我流)의 변설(辯說)일른지 모르나,

그러기에 나는 60일 휴가 동안 제법 독서줄이나 하였다고 할 뱃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먼 산이 불러 나온 듯이 다가서더니,

아침 저녁으로 제법 산들산들한 맛이 베적삼 속으로 기어든다.

벌레가, 달이, 이슬이, 창공이, 유난스럽게 바빠할 때

이 무딘 마음에도 먼지 앉은 책상 사이로 기어가는 부지런이 부풀어오름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