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 임경희
나의 방에는 회전할 때마다 다그락 소리를 내는 낡은 검정색 선풍기가 있다. 내가 대학 졸업 후 첫 월급을 타서 샀으니 아마도 나이가 서른 살이 넘었으리라. 회전날개도 겨우 3개만 붙어있는 소박한 선풍기다. 아래 몸체에는 회전 조절용 스위치 한 개, 속도 조절과 정지 작동용 버튼만이 부착된 단순한 선풍기이다. 그 흔한 리모콘도 없고 광센서도 없는 칙칙한 모습이다. 디자인과 기능 모두가 원시적인 이 선풍기는 진화되지 않은 채 바람을 일으키는 본연의 기능만을 갖고 깜냥깜냥 최선을 다해 돌아간다.
아들은 이제 사용할 만큼 사용했으니 버리면 새로 하나 장만해 드리겠다고 하지만 그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아무튼 우리 엄마의 절약 정신은 알아주어야 한단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어쩐지 그 선풍기가 지천명을 지나온 나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제 인생의 반을 훌쩍 뛰어 넘었기에 인생의 어떠한 원대하고 새로운 꿈을 세울 수 없고, 그렇다고 인생에 대한 포기도 체념도 안 되는 어정쩡한 나이를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나의 선풍기가 비록 소음을 내고는 있지만 여전히 돌아가면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니 만족한다. 만약에 내가 유난히 더위를 타면 더 강렬한 시원함을 추구하여 갈등이 있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갑상선 질환을 갖고 있기에 쉽게 더위를 타지 않는다. 더위라니, 오히려 체온조절이 잘 안 되는 탓으로 추위를 심하게 탄다. 딸아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내의를 입고, 가장 늦게 내의를 벗는 사람이 우리 엄마일 거라고 장담한다. 그래서인지 이 선풍기만으로도 충분히 시원하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더위로 인한 참혹한 기억이 있다.
그 해는 1994년이었다. 어느 누가 인생을 알겠는가. 14년 살던 남편과 ‘재판상 이혼’이라는 끔찍한 과정을 겪었다. 당시 엄마랑 함께 살기를 원했던 초등학교 3학년 딸과,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그렇게 우리 가정은 한꺼번에 뿌리가 뽑혀져 내팽개쳐졌다. 사글세의 푹푹 찌는 단칸방에서 앞으로 살아갈 날이 아득하기만 했었다. 그 방은 서향이었다. 작열하는 여름 석양의 빛이 내리쪼일 때 방안은 달구어진 후라이팬 같았다. 우리들은 그 후라이팬에서 달달 볶아지고 있는 콩 같았다.
그 해 여름은 그야말로 살인적인 더위였다. 기상청이 생긴 이래 최고 더운 날씨라고 했다. 아이들 학교에서는 무더위로 단축 수업을 실시했다. 우리 집에 한 대뿐인 선풍기에서는 후끈후끈한 더운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라면을 끓여 주었는데 더워서 먹기 싫다고 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친정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에어컨도 없이 이 더위를 어떻게 지내냐? 그러지 말고 오늘 집에 아이들 데리고 오너라.”나는 아버지의 가슴에 ‘이혼’이라는 대못을 박은 자식이었다. 친정어머니는 이런 나를 “지 눈깔을 지가 찔렀다.”고 표현하셨다. 어느 누구에게도 초라한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서슬 퍼런 자존심 때문에 친정집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에어컨이라는 단어에 두 아이는 외갓집에 당장 가겠단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선 길은 까만 아스팔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물컹거렸다. 지면 위로는 끊임없이 지열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정말 찜통에서 쪄지는 듯한 무더위였다. 숨이 턱턱 막혀 뛰어 들어간 친정집은 너무도 시원하였다. 흡사 천국 같았다. 남동생은 엄마가 저녁 찬거리 준비하러 시장에 가셨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시원한 공간에 들어서니 갑자기 시장기가 돌았나보다. 아이들은 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똑같은 음식이 실내 온도에 따라 그 맛이 현저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맛있게 허겁지겁 라면을 먹고 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우리 가족의 몰골이 너무도 창피하다는 모멸감으로 울컥 목이 멨다. 그 순간, 이런 결심을 했다.
“어서 어서 돈을 벌어 꼭 에어컨을 사리라.”
집에 돌아와 한 대 뿐인 선풍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여전히 후끈후끈하고 끈적이는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그 습습함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그래도 우리 집이 외갓집보다 훨씬 더 좋아. 그치 오빠?”
딸은 검은 포도알 같은 눈빛으로 오빠의 동의를 구했다. 어린 눈에도 엄마가 너무 애처롭게 보였고, 그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던 거 같았다.
그렇다. 이 아이들이 있는 한 나는 열심히 살아내야 했다. 그것이 이 아이들에 대한 나의 의무이고,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강산이 모두 바뀔 정도의 긴 세월이 흘러갔다. 그 날의 결심대로 꿋꿋하게 견디고 살아냈다. 두 아이는 자라서 현재 모두 원하는 대학교를 졸업했다. 아들은 수의대학을 나와 수의직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고, 딸은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지금 우리 집에는 거실에 커다란 에어컨이 있다. 그뿐인가. 지난주에는 어려운 취업 시험 준비로 불타고 있는 아이들 방에 각각 벽걸이용 에어컨도 설치했다. 그러나 내 방에는 오직 그 선풍기만이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가면 가난도 아른아른 추억이 되는 거 같다. 아이들은 지금도 가끔씩 94년의 ‘라면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다그락. 다그락……. 신산하고 굴곡진 나의 역사를 낱낱이 곁에서 지켜본 검정색 선풍기가 돌아간다. 언젠가는 들고 나가 A/S를 받아야겠다고 생각도 했지만 이것도 마음먹기 나름이다. 어찌 생각하니 아이들이 모두 커버려 적요해진 집안의 심심한 나를 위한 음악 같기도 하다.
그렇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다지 슬플 것도 없고, 그렇다고 그다지 기쁠 것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그 달관을 깨달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사실 ‘살아간다는 것’은 별게 아니다. 자기 나름의 작은 ‘화평(和平)’을 만드는 애씀이다. 내가 갖고 있는 작은 것에 만족하며 늘 평화를 갖기를 노력할 것이다. 언제 멈추어 서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해 돌아가는 선풍기이고 싶다. 아이들이 삶을 살아가다가 흘러내린 이마의 땀을 식혀주는 그 한 줄기 바람이고 싶다.
다그락 다그락……. (양주 김삿감전국문학회 백일장 산문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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