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방해하는 것들
마귀는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계속하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방법을 다 동원한다.
어떤 때는 힘을 사용하여 강압적으로 방해하기도 한다.
건강을 빼앗아 가고, 직장을 빼앗아 가고, 물질을 빼앗아 가고, 생명을 빼앗아 간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너무 많은 것을 주어서
착각을 일으켜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너무 지나친 건강을 주어서 그것으로 정욕을 위해 사용하게 하고,
너무 많은 물질을 주어서 그것을 사용하느라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마귀의 공격은 얼마나 지혜스러운지
일반적인 눈을 가지고는 그 방해를 알아 차릴 수가 없다.
어떤 때는 마치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인양 착각하게 한다.
요나가 니느웨를 피하여 다시스로 갈 때 순조로이 배를 만났던 것과
순풍이 일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했던 것들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정결을 방해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요일 2:16에 말씀하기를 인간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육체를 좇아 일어나는 것들이다. 인간의 욕심이 문제다.
욕심은 죄를 낳게 하고 그 결과는 사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딤전 6:9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서 떨어지나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정욕은 사람을 파멸로 인도하는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마치 푸주간으로 끌려가는 소 처럼 정욕을 따라 간다.
물질로 빚어진 잘못은 갚으면 되고 사과하면 되지만
그릇된 정욕에서 나오는 일들은 갚을 길이 없다.
딤후 2:22에서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하면서
청년들의 경건된 생활을 강하게 명령을 하고 있다.
자랑하는 것 역시 우리로 하여금 경건생활을 방해하게 한다.
어떤 집사님이 딸 자랑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자랑할만 하였다.
남들 처럼 유명한 교수 밑에서 렛슨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좋은 대학에 쉽게 들어간 것과
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받게 된 것과 유학의 길이 열리는 것이 정말로 자랑할만 하였다.
그 집사님은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란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하나님께 은혜를 돌린다기 보다는
자기 자랑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사님이 간 후에 얘기를 듣던 다른 집사님들의 말이
그 집사님은 너무 자랑을 많이 하기에 별로 친근감이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라 할찌라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자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자기 자랑을 지나치게 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자기의 경건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기도하면 병자가 낳게 되고, 신비적 체험이 일어나게 되며,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도 살아나게 되는 역사가 있었다.
얼마나 간증할 것이 많으며 얼마나 자랑할 것이 많이 있겠는가?
나는 사도 바울을 볼 때에
그 분이 삼층천을 보았노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가진다.
그는 대단한 신비적 체험을 했다. 천국을 직접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바울인들 어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자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못난 것을 자랑하였고 복음을 자랑하였다.
분위기 또한 우리의 경건 생활을 방해한다. 분위기는 참으로 중요하다.
은혜스러운 분위기가 있는가 하면 멜로딕한 분위기가 있다.
사람 사는데 분위기는 참으로 중요하다.
분위기 없는 여자, 분위기 없는 남자는 참 재미가 없다.
사람은 분위기의 동물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분위기를 잘 타는 사람은 지성이 있어 보이고, 개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야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영성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영성을 해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탄은 우리의 경건을 해치게 하는데 있어서 이런 분위기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발을 묶어 놓는다.
마약 밀매 조직에 빠지게 된 사람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빠져 나올 수 없다고 한다.
마귀가 우리를 이용하는 분위기는 마치 이와 같다.
우리는 항상 경건한 분위기, 은혜를 사모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 외의 것들은 순간적으로 재미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신앙의 손해를 초래하게 된다.
성취 후의 자만심도 우리의 경건을 방해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것은 감사하지만 거기에 도취되어서 사는 것은
경건을 잃게 하는 요소가 됨을 알아야 한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홍수의 심판을 받는데서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노아가 한 일은 무엇인가?
술취함으로 누추한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닌가?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다.
믿음이 있노라고, 내 속에 예수가 있노라고 자신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 때문에 넘어지는 일들이 허다하다.
이것은 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서운 적이다.
자신을 위해 쳐 놓은 울타리 또한 우리의 경건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옳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경건을 잃게 한다.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는 타인을 받지 못한다.
요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 때문에 경건을 잃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게 되었다.
가룟유다는 어떤가? 예수님의 태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열심과 같지 않았다.
그 결과 예수님을 팔아버렸다.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을 앞서갈 때에 그는 이미 경건을 잃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판단이 강단에서 전파되는 말씀을 앞서며 판단하려고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잃게 하는 요소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나사렛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나친 울타리 때문에 결국에는
예수님도 거절하였던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관계 보다는 소유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성이다.
로울 하우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은 관계성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뒤집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계성 속에서 만족하지 않고 소유함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관계는 love person, use things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어 지금은 use person, love things가 되었다.
가치관의 혼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관계가 쾌락과 소유로 변모해 버렸다.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은 자져야 속이 시원하게 되었다.
산길을 걸어가다가 예쁜 꽃을 보면 꺾어야 하고,
백화점을 지나다가 좋은 물건을 보면 사야 하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결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안되면 한이 싸이게 되고, 한이 싸이니까 한풀이를 하려고 한다.
그러니 목사의 장례식에 한풀이가 등장하게 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일들에서 깨끗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