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젊은이에게

깨끗한 청년

Joyfule 2016. 5. 18. 10:36

 깨끗한 청년   
시 119:9-16
뉴스위크지를 읽는 가운데 에이즈에 걸려 찾은 자유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에서는 쿠바 청년이 자유를 찾기 위해서 스스로 에이즈에 걸렸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 청년은 에이즈에 걸리기 위해서 스스로 에이즈 요양소에 찾아가 
거기에 있는 사람의 피를 수혈받아 스스로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 즉은 에이즈 요양소에는 자유가 있다는 것, 하루 세끼 식사를 제공해 준다는 것, 
에어콘이 가동된다는 것, 정권도 없다는 것, 경찰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을 들고 있다. 
기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또 소개하고 있다. 
그 사람은 후안 카를로스 킨타나라는 21살난 청년의 내용이다. 
그 청년도 역시 에이즈에 걸리기 위해서 일부러 에이즈 요양소에 찾아가 피를 수혈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 그가 사랑하고 있는 17살난 여자 친구가 에이즈에 걸려 요양소에 있는데 
사랑하는 여인과 떨어지기 싫어서 자신도 에이즈에 걸리면 같은 요양소에 있으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에이즈에 걸린 피를 수혈하였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을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육신의 고통을 감안한다고 하는 아름다운 인권 운동가를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운 남녀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도대체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웃기지도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사랑을 위해서는 아름다운 일처럼 여겨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온통 죄악으로 만연된 세상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하게 할 정도로 타락되어 있다. 
미국의 센프란시스코는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도 다를 바가 없다. 
성윤리가 극도로 타락되어 있으며 교육계, 정치계, 종교계, 문화계등 
모든 분야가 다 변색 혹은 퇴색되어 타락의 일로를 걷고 있다. 
교육계의 타락은 교사의 권위가 매도되어지게 되었으며, 
정치계의 타락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을 볼모로 잡아 흔들고 있다. 
종교계의 타락은 진리의 추구보다는 진리를 이용한 치부에 앞장서 있다. 
이런 일들은 구약 시대에도 있었다. 
입에 물리면 평강을 외치고 주는 것이 없으면 서슴 없이 저주를 하였던 것이다. 
경제 윤리는 어떤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악도 서슴치 않고 저지르지 않는가?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남을 밟아야 하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많이 흐트러졌다. 
자식에 대한 편애도 문제지만 부모에 대한 공경이 없다. 
용돈이 필요해서 부모를 죽이고도 양심에 찔림을 받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이는 시대다. 
한국판 카사노바의 사건은 어떤가? 
박인수라는 사람은 70여명의 여인을 농락했는가 하면 
요즈음에는 N씨라는 46살의 중년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103명이나 되는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 때문에 저지러진 이 죄악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속할 법이 없다고 하니 
법조계 또한 타락한 것이 아니라고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일들을 보건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가히 짐작할만 하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항상 우리를 유혹하여 동참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 청년은 이런 가운데서 뭍어 살고 있다. 
여기에서 동참하느냐 도피하느냐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동참하든 도피하든 어쨋든 여기에 뭍어 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뭍어 가는 생활의 특징은 무디어지는 것이다. 
윤리관이나 도덕관이나 가치관이 점차적으로 무디어진다.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자꾸 눈으로 보다 보면 무디어지게 되어 있고, 
무디어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게 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항구에 살았다. 
그들은 항상 항구를 드나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윤리적으로 문란하고 
종교적을 혼합되어진 생활을 접하면서 살았다. 
그 결과 그들은 점차적으로 그런 환경에 무디어지게 되었고 결국은 자신들도 거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의 혼돈되어진 가치관은 
그 가운데 사는 기독교인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신앙관의 흔들림과 가치관의 흔들림은 그들의 삶 자체를 흔들어 놓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다소 풍자적인 그림을 그렸다. 
세상에 물들어 가는 기독교를 풍자하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내용을 보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가 물속으로 빠져들어가는데 
설상가상으로 배에 구멍이 생겨서 배가 급속도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교회가 타락하여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 거기에 내부적 갈등마져 생겨 
급속도로 빠지고 있는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이것은 교회만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내 속에 무너져가고 있는 신앙과 윤리를 질타하고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거룩한 것 같고 신앙생활이 바로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에는 
썩은 것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을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교회에 앉아 있는 모습은 거룩하지만 그들의 삶은 더럽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의인 10명이 없는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안타까움이 많은 시대다. 
이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그 속에 있는 나는 누구인가? 
지금 이 시대는 위기다. 
위기의 유혹이 우리와 함께 있다. 
위기 관리 능력과 위기 대응 능력이 없는 정부는 정부로써 실존해야 하는 
의미를 잃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유혹의 환경 속에서 나는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 
ㅡ 펌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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