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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을 나온 비노드 코슬라의 재기 스토리

Joyfule 2017. 12. 28. 12:04
 

 

     (2) 선을 나온 비노드 코슬라의 재기 스토리

         

 

코슬라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선 이사회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코슬라에게 퇴진할 것을 권유한다. 그는 창업자로서의 지분은 유지한 채 회사를 떠나지만 인텔과 같은 거대회사를 만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그에게 선을 떠나라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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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을 나온 후 코슬라의 삶은 지금까지보다 더 극적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 필자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비노드 코슬라라는 인물에 강하게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뿌리가 없는 미국사회에서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 그가 벌이는 승부는 처절함마저 느끼게 한다. 야심으로 뭉친 코슬라가 타의에 의해 자신이 만든 회사를 떠나게 됐을 때의 심정이 상상이 된다. 그러나 그는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났다. 이번에는 벤처자본가로서 화려하게 복귀한 그에게 어느 잡지는 ‘실리콘밸리의 왕’이라는 헌사를 바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빠질 수 있는 단선적인 평가의 약점을 보완하고 논의의 다양함을 위해 비노드 코슬라라는 인물을 좀더 추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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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선을 떠난 후 IT업계와 단절한 채 아내와 함께 포도밭을 가꾸면서 지낸다. 그러나 때로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거나 하늘과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면서 마음 속의 갈망을 진정시키는 생활이었다. 그런 그를 다시 실리콘밸리로 끌어들인 사람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를 선에서 쫓아내는 데 가장 앞장섰던 벤처자본가 존 도어였다. 그는 인텔과 애플컴퓨터에 대한 투자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코슬라에게 선을 떠나라고 권유했던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벤처회사에 참여할 것을 권유한다. 회사를 만드는 것이 필생의 꿈이 아니었던가. 코슬라는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벤처자본가로서의 첫 출발은 그렇게 순조롭지 못했다. 그의 생각이 시장의 요구보다 너무 앞서 나갔던 것이다. 그는 투자한 세 회사에서 모두 쓴맛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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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공백기간이 시작됐다. 1992년 가족이 모두 인도로 이주한다. 코슬라는 한달에 한번 꼴로 미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간헐적으로 벤처회사의 일에 간여했다. 그러나 이 기간이 그에게 다시 한번 자신을 갈고 닦는 기회가 됐다. 인도에서 미국까지는 비행기로 20시간이 넘는 거리다. 코슬라는 미국을 왕래하면서 비행기 속에서 엄청난 독서를 한다. 그가 주로 읽은 책은 광(光)네트워크와 같은 전문서적이었다. 지금도 그는 비행기 여행을 하면서 전문가가 됐다고 농담할 정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기간에 그가 얻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었다. 1990년대초 인터넷의 폭발적 확산과 그 인프라의 중요성을 내다보게 된 것이다. 그의 손은 ‘미다스의 손’으로 변했다. 1999년 세런트라는 조그만 광통신 장비회사가 80억달러라는 엄청난 액수로 시스코시스템스에 팔렸을 때 월스트리트를 비롯해 모든 언론이 떠들썩했다.<“월간중앙” 5월호 ‘진정한 인터넷 왕 존 체임버스’ 기사 참조> 그러나 그 거래에서 진짜 웃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코슬라였다. 1996년 세런트 창업 초기부터 물을 주며 키운 사람이 바로 코슬라였기 때문이다. 그때 지분 30%를 인수하면서 투자한 800만달러는 무려 24억달러로 300배나 불어난 것이다. 언론의 화려한 조명과 함께 코슬라는 실리콘밸리의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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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만달러 투자가 3년만에 24억달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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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화려한 행진은 계속된다. 현재 라우터 시장에서 시스코시스템스의 아성을 무섭게 공략하고 있는 주니퍼 네트웍스가 창업할 때 종잣돈으로 코슬라가 투자한 300만달러는 지금 20억달러로 불어났다. 또 코슬라가 투자한 시아라시스템스가 레드백 네트웍스에 팔리면서 그에게 돌아간 돈은 43억달러였다. 그의 이런 기록에 맞설 만한 벤처자본가로는 실리콘밸리에서 존 도어나 돈 발렌타인(“월간중앙” 5월호 ‘진정한 인터넷 왕 존 체임버스’ 기사 참조)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선에 있을 때부터 그에게 꼬리표처럼 붙어다녔던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평판은 대부분 일에 대한 코슬라 본인의 엄격한 기준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이 돈을 댄 벤처회사에도 이 기준을 적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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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빈말이라도 잘한다고 하면 팀워크를 해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잘 안된 일을 보고도 적당히 넘어가면 결국 회사를 망치게 된다.” 코슬라가 IT잡지 ‘래드해링’에서 밝힌 말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자기 기준에 비춰 평균 이하의 사람에게는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기준은 공정하다는 것이 그와 함께 일한 기업인들의 말이다.코슬라는 미국에서 산 24년 동안 무려 40개 회사가 탄생하는 것을 도왔다. 그것은 주식시장 가치로 1,500억달러에 이르는 것이며 일자리로 따져보면 24년 동안 미국에서 매일 6개의 일자리를 창출한 셈이다. 어느 잡지가 그에게 ‘왕’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붙여준 것도 납득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