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당신의 아이를 칭찬하는 방법
지은이: 세키네 마사아키
제3장 산뜻하게 칭찬하는 방법
8편 문제학생과 함께 달린다
3. 오토바이를 훔쳐서 타고 다닌 학생 (B) (C)
<3>마지막까지 함께 달리겠다는 각오와 능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것뿐이었다.
그의 불행은 가정의 불행, 가정의 불행은 부모의 불행, 부모의 불행은......
하는 식으로 생각하니 T의 불행은 그의 가정의 구조적인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T에게 나 같은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의 울분을 함께 나누며 공감을 느끼는 것뿐이지 않은가?
더구나 끝까지 그와 공감을 나눌 수 있을까하는 불안도 들었다.
그의 불행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힘든 일이었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교사들은 T와 같은 아이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중간에 자르고 비판한다.
학생이 털어놓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감정이 북받친 절규인데
우리는 그것을 판에 박힌 논리로 반박하려고 한다.
"그건 네가 너무 제멋대로 생각한 거야."라든가,
"부모님에게는 네가 모르는 고충이 있단다."라고 판에 박힌 말을 하면서 입을 막아 버린다.
그러나 그런 판에 박힌 반박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들과 교사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뿐이다.
그래서 결국 학생들은 '이 선생님도 우리 부모와 마찬가지야. 어른들이란 다 그렇지 뭐.
우리들의 심정은 조금도 알려고 하지 않아.
우리를 이해하는 것은 역시 우리 친구들 뿐이야.'라는 확신을 굳히게 된다.
왜 교사들은 판에 박힌 사고와 충고를 좋아하고
학생의 감정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걸까.
그들의 짐을 나누어지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재빨리 입막음을 하려는 의도가 강한 것은 아닐까.
그들의 감정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을 느끼다 보면 우리의 감정도 어둡고 괴로워진다.
그것은 비참한 전쟁영화를 몇 시간이나 지켜보는 심정과 비슷하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난민들,
말라 비틀어져서 뼈만 남은 아이들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학생들의 한스런 절규를 듣다 보면, 솔직히 말해서 피곤해진다.
대개는 참지 못하고 중간에서 잘라 버린다.
"너만 그런 고민에 쌓여 있는 게 아니야."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나 한 일이야?"
"아무리 엉망진창이더라도 그게 네 집인 걸 참아야지 어떻게 하겠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집에나 고민은 있는 법이야."
이런 판에 박힌 설교를 하면서 이야기를 끊는다.
물론 교사들도 그들의 불행을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그들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들과 함께 헤맬 위험이 있다.
교사 자신이 확고한 주체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면 함께 쓰러지고 만다.
우리는 위와 같은 우려를 무의식 중에 마음 깊이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렵다. 산산이 부서진 가정을 타인인 내가 행복하게 되돌려 줄 수는 없다.
아니, 행복하게 되돌리겠다는 발상자체가 오만이고 주제넘은 생각일 수도 있다.
산산이 부서진 가정을 행복하게 되돌리는 것은 역시 당사자의 몫이다.
교사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포자기에 빠지기 쉬운 그들을 떠받치는 것,
그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T와 같이 문제가 있는 아이들에게 삶의 보람을 찾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가정에서 혹은 학교에서 어떤 문제가 발행했을 때,
그것은 부모 혹은 교사인 우리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아이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생각하자.
T와 끝까지 함께 달리는 교사가 되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각오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