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Joyful묵상노트

Joyful 열 한번째 묵상 겔러리

Joyfule 2009. 2. 9. 08:12


          Joyful 열 한번째 묵상 겔러리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부산 성지곡 유원지에 가면 울창한 삼나무 숲이 있다. 하늘을 향해 쭉쭉뻗어 곧게 자란 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든지 마치 반듯하게 잘 자란 청년들을 보는 것 같은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어려서부터 막 자란 잡목들은 볼품도 없고 쓸모도 없지만 쓸만한 재목을 만들기 위해, 또는 아름다운 관상수를 만들기 위해, 어려서부터 불필요한 가지들을 전지해주고 다듬어 준 나무들은 보기도 좋고 쓸모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 쓸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값진 인생을 살기 위해서, 보석같이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자신을 갈고 깎고 다듬어가야 한다. 가지가 잘려나가는 아픔이 있지만 이것이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거부하고 싫어한다면 볼품없고 쓸모없는 잡목이 될수 밖에........ 한떡 남편이 퇴직한 후에 부산으로 이사와서 동생이 목회하는 광명교회에 출석한지 얼마되지 않아 성도들이 누가 누군지 아직 잘 모를 때였다. 우리 집에 방문한 박목사에게 "그 이쁜 권사님 이름이 뭐야?" 하고 물었더니 "이쁜 권사님요? 이쁜 권사님 누구? 우리 권사님들 다 이쁜데..." 정말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 제 자식이 다 곱게 보이는 어버이의 마음인가보다 생각했다. 성도들과 아직 정이 안 들었을땐 객관적으로 보아 특별히 이쁜 권사님이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모든 권사님들이 다 미인으로 보인다. 보는 시각이 그렇게 달라지다니... 내가 생각해봐도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성도들의 사랑에 눈이 멀었을까? 예수님의 사랑으로 한떡이 되었기 때문일까? 고린도전서 10:16~17에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한 떡에 참여함이라." 성경적 경제윤리 경제문제는 우리 삶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생존의 기본 요소이다 지혜로운 경제생활이란 취득,점유,사용을 잘하는 것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경제윤리는 수고하고 양식을 먹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을 사용해서 정직하게 열심히 일해서 버는 것. 이것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지혜로운 경제생활을 위해서는 1. 정상적인 수입인가. 2. 무엇을 기준으로 돈쓰는 계획을 세우는가. 3.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가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수입 보다 지출이 적어야 된다. (이상은 십여년 전에 책에서 읽은 글인데 무슨 책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게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씨와 양식으로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유권과 회수권을 인정하고 위탁받은 청지기처럼 살아야 한다. 양식은 먹으라고 주신 것이고, 씨는 심으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많이 가졌다고 교만할 것도 없고 조금밖에 없다고 기 죽을 필요도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돈과 시간은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짐이다." 라고 했다. 돈과 시간에 부담감을 갖다니... 얼마나 소극적인 사람인가 생각되지만 돈과 시간을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 앞에 계산할 때가 오기때문이다. 돈과 시간. 재능.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쓰고 있는가 점검해 볼 일이다. 삶이란.... 하루하루의 삶이란 .... 벽돌 쌓기와 같다고 본다 벽돌을 한 장씩, 한 장씩 쌓아 올리듯이 책임과 의무를 위해서 ... 소망과 비전을 위해서 ... 하루하루를 성실함으로 채워나가는 것이라고. 그동안 열심히 했잖아, 오늘 하루쯤이야... 하고 게으름부린 하루가 벽돌쌓기의 구멍이 생기는 것이라면? 단 하루라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춘향전에서 배운다 목사님이 설교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과 시련속에서도 주님께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것은 마치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옥중에서 고난당하며 금의환향할 사랑하는 이도령을 기다리는 것에 비유했다.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비유라고 생각했다. 변사또의 수청을 들었으면 칼을 쓰고 옥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될것을... 변사또의 사랑을 받고 호강하며 편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을... 사랑하는 이도령과의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부귀영화를 거절하고 사랑하는 이의 약속을 믿고 고난을 참고 있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일사각오를 하면서....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왔을때 춘향이가 분단장 곱게하고 잠자리 날개같은 옷을 입고 변학도 옆에서 아양떨다가 이도령을 보자 나비같이 사뿐히 이도령옆에 다가와 앉으며 "그리웠어요" "사랑해요" 한다면 그런 모습이 이뻐보이겠는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옥중에서 목에 칼을 쓰고 화장끼 없는 얼굴에 머리는 산발을 하고 여기저기 매맞은 흔적으로 온 몸이 울긋불긋 멍든 것을 볼 때 어떤 모습이 이도령의 눈에 더 이뻐보이겠는가? 아마도 심장이 타들어가는 사랑의 마음으로 옥중의 춘향이를 보았을 것이다. 예수의 이름때문에 매맞고 헐벗고 굶주리며 환난과 핍박,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성도들이여 소망중에 인내하라. 요한계시록7:13~17에는 재림하신 주님 앞에서 펼쳐지는 계시이다. (장로중에 하나가 내게 응답하여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은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것임이러라.) ※ 세상풍속을 좇아, 하고싶은 짓 다하며 세상에 한 발, 교회에 한 발 들여놓고 적당히 즐기다가 주님 다시 오실 때에 " 주님, 사랑해요! 주님, 저 아시죠?"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