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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8월11일 오후 문화일보홀에서 열린 「제77회 조갑제의 현대사 강좌」 중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의 강연 중 일부를 정리한 내용이다. |
金成昱 |
박정희(朴正熙)의 업적은 설명하기 쉽지만, 이승만(李承晩)은 설명이 어렵다. 「韓美동맹, 교육개혁, 농지개혁, 자유민주주의...」이승만이 이룬 것은 눈에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박정희의 눈에 보이는 근대화는 이승만이 만들어 낸 성취(成就) 위에서 가능했다. 이승만은 위대한 일을 이루곤 동네북이 됐다. 사면초가(四面楚歌)가 아니라, 오면초가이다. 김일성은 온 힘을 다해 이승만을 깎아내렸고, 친북좌익이 부화뇌동해왔다. 박정희는 물론, 4·19를 주도한 세대도 이승만 평가에 인색하다. 후손(後孫)도 번성하질 못했다. 내가 아니고, 여러분이 아니면 이승만을 바로 세울 길이 없다. 이대로 넘어가면 친일파나 등용한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판이다. 다만 「평화선(平和線)」을 그어 독도를 지킨 일이나 평가받는 정도이다. 이승만은 52년 6·25전쟁 중에도 지방선거를 치러 읍·면·도·시의회를 구성했다. 만 명이나 뽑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 선거였다. 전쟁 중에도 민주주의를 가르쳐야 한다고 이승만이 밀어붙인 결과였다. 닉슨 회고록을 보면 이승만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유추해볼 대목이 있다. 닉슨은 훗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불명예 사퇴하지만, 실제는 공산주의와 대결한 위대한 전략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사임 후에도 열심히 책을 썼고,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죽었다. 그가 한 가장 큰 업적은 중국과 수교한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을 親美로 돌려놓고 소련을 고립시켰다. 닉슨은 1953년 10월 경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갔었다. 1950년~60년대는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인도의 네루, 이집트 낫세르, 가나의 엔크루마 등이「제3세계」를 만들어 목소리를 내던 시절이다. 닉슨은 호화로운 수카르노의 궁전에 초대받은 이야기를 적었다. 수도 자카르타의 엉망진창으로 더렵혀진 모습을 비교하며 『수카르노는 독립전쟁 땐 영웅이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탄했다. 캄보디아의 국왕 시아누크를 만나서는 『정치는 관심이 없고, 음악만 이야기 한다』며 『희망이 없다』고 평가한다. 高原별장을 천국처럼 꾸며놓은 베트남의 국왕 바오다이를 만나서는 역시 『나라 일엔 관심이 없고, 개인이익만 챙긴다』고 혹평했다. 닉슨은 말레이시아의 영국인 총독이 『동남아 지도자 중 한 사람도 쓸모가 없는데, 여기에 이승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닉슨은 이어서 한국도 들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로, 친서를 전달한 후 미국과 합의 없이 북진(北進)해선 안 된다는 보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닉슨에게, 『한국의 지도자가 미국의 명령에 복종만 하는 지도자라는 사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알려지는 순간, 미국은 공산주의와 대항하는 가장 큰 수단을 잃을 것』이라며 『이승만과 한국은 어떤 쪽으로 튈지 알 수 없다. 이승만은 예측이 불가능(unpredictable)한 사람인 것을 보여줘야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닉슨은 이승만의 용기와 知的능력에 감동을 받았다고 썼다. 그는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면서 예측불가능성(unpredictability)을 깊이 생각해 보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보면서 그 노인(old man)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사후에 알게 됐다』고 적고 있다. 공산주의자와 싸울 땐 카드를 먼저 보여줘선 안 되고, 예측불가능성을 유지해야 함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자기를 도운 사람과 싸우기 어렵다. 이승만은 6·25에서 자유를 지켜 준 미국과 세 번이나 싸웠다.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서였다. 우선 해방 직후 미국은 좌우합작 정부를 만들라고 집요하게 설득했지만, 이승만이 이를 거부했다. 그렇게 하면 한국은 공산화(共産化)된다고 보았다. 몸의 반(半)이라도 성해야 나머지 반(半)을 건강케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소위 단정(單政)노선이었다.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건강하게 살아남아, 그 힘으로 북한을 해방하라는 의지였다. 6·25전쟁 중인 52년에도 미국과 대립했다. 임시수도 부산에선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間選)으로 선출했는데, 장면(張勉)이 뽑힐 가능성이 높았다. 내각제(內閣制)로 개헌하자는 움직임도 거셌다. 농지개혁에 반대해 온 한민당 계열이 反이승만의 중심세력이었다. 이승만은 이때 직선제(直選制) 개헌에 나섰다. 계엄령을 펴서 국회의원을 잡아넣고, 내각제 개헌안과 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췌개헌」한 것이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등 육본은 이승만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운 뒤,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던 미국 측의 묵인을 요구했다. 워싱턴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승만을 대체할 리더십이 없다. 후방에서 내전(內戰)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에 대해 독재(獨裁)했다고 욕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정치의 수준은 어떠했나? 6·25직전 일부 국회의원들이 미군 철수 결의안을 내고, 이것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UN한국위원회에 별도로 진정서를 낼 정도였다. 이 국회의원들은 미군 철수 이후 남은 500명의 군사고문단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대통령에 국회나 국민에 대해서 한 일은 비판하는데, 국회가 대통령에 대해서 한 일은 왜 비판하지 않는가? 전쟁 중에 장면이 대통령이 됐다면, 한국이 과연 휴전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멱살을 잡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이나, 20개 사단 현대화, 천문학적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한국이 월남처럼 공산화되지 않은 채 60년대를 넘길 수 있었을까? 이승만이 미국과 대립한 세 번째 사건은 반공포로석방 문제였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고 단독 북진을 하겠다고 계속 경고했다. 그리곤 53년 6월18일 2만5천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해 버렸다. 이런 압박을 통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만들어냈다. 이승만은 세 번째 도박을 통해 國益을 지켜냈다. 북한은 반공포로석방에 대한 보복으로 더 많은 숫자의 국군포로들을 송환하지 않게 된다. 북한에 남은 국군은 대한민국 번영의 기초가 된 한미동맹을 만들어내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이다. 이승만은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 사장이었고, 최초의 박사,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를 詩人(漢詩)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무초 전 주미대사는 『고차원에서 복잡한 세계정세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은 무엇보다 국익을 위해 미국을 상대로 死鬪를 벌인 사람이었다. 대처가 탄광노조와 싸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과 비즈니스맨은 다르다. 전자는 가치를 걸고 승부하지만, 후자는 노조와 적당히 타협하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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