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식견과 결단력 있는 대통령
김점곤 ㅣ 경희대 명예교수
■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건국의 위업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가 남기신 대한민국의 건국 위업은 동아시아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민주공화국의 창건이며, 오늘의 번영된 조국의 튼튼한 토대와 초석이 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은 오로지 우남의 지혜로운 영단과 애국애족의 열정, 용기와 과감한 행동력, 그리고 범인의 상상을 초월한 혜안과 결단에 의한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과업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는 2차대전의 전승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의 압박과 더불어 남북 공산주의 집단의 간교한 책동과 집요한 무력투쟁의 파괴적인 저항과 도전에 굳은 국민의 단결로 이끌어 내시고, 신생 조국의 군총사령관으로서 공산세력의 저항을 울리친 건국 대업의 과정은 고난의 가시밭의 연속이었습니다.
내외 정세의 혼미 속에서 일부 남북협상 압력 등 온갖 방해를 물리치고 스스로 결단한 '정읍선언'대로 총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대업은 오로지 우남의 현명한 판단과 결단력의 결정이라고 밖에 다른 평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 망명시절 우남은 각기 다른 두 길을 동시에 걷는데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우남은 고난의 망명생활 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시는 한편, 미국의 명문 대학만을 선택해서 선진학문에 열중한 초인적인 지적 거인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우남에게 이러한 첨단학문의 수학과 더불어 그 뛰어난 지적 역량이 없었던들 1945년 이후 2차대전의 전승대국들에 둘러쌓인 분단 한반도의 남반부에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위대한 과업은 상상마저 할 수 없는 어려운 난제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혼돈의 회색공간인 남한 땅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남의 탁월한 식견과 용기에 찬 결단없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위업이었습니다.
■ 유일한 대공(對共) 승리로 기록된 6 · 25 이렇게 내외의 저항과 압작을 배제하면서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건국 전후의 정황은 5월 10일의 총선거를 결사 방해하는 노동당의 책동으로, 예컨대 제주도에서는 이미 이른바 4 · 3폭동이 벌어졌고,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소요사태로 인해 투료방해를 받아 몇 개 지역에서 재투표를 실시하는 사태로까지 악화되었으며, 또한 이에 호응하여 여수에서는 10월 19일 제14연대 일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대한민국 수립을 반대하는 공산주의의 조직적이고 전면적인 무력저항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북쪽의 인민공화국으로부터는 고도한 정치교육을 받은 대규모 유격대를 10여 차례에 걸쳐 파상 남침시켜 남쪽의 공산무력 집단과 호응하여 공동전선을 펴기도 했습니다.
1950년 초 이들 무장반도들을 힘겹게 섬멸시키는데 성공하자,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소련제 무기로 중무장하고 중공의 지원을 받은 북한공산군이 소련제 중전차를 앞세워 대전차 무기마저 없는 소총만의 경무장 부대인 대한민국 국군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이 6 · 25는 2차대전이 끝난지 5년만에 소련을 맹주로 한 공산진영이 동북아에서 시도한 최초의 2차 대전형의 적화 침략전쟁이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역사에 있어 공산군의 도전을 받은 상대는 거의다 패배하였으나, 6 · 25전쟁은 북한과 그를 지원하는 공산권의 남침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한 역사상 최초이고 유일한 대공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우남의 현명과 용기와 결단과 설득력으로 유엔결의를 얻어내어 미국을 위시한 자유세계 16개 국가의 참전을 이끌어냄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자유수호전선'을 이룩했습니다. 따라서 국제 공산주의의 세게적화 정복의 흉악한 야망을 최초로 분쇄한 유일한 승리공간이 바로 우남이 영도한 대한민국이었습니다.
■ 호응 · 봉기없는 귀중한 '72시간' 계속 부단한 국가의 위기 속에서 우남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또한 국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빛나는 족적을 남기시고 위기의 세계사 흐름을 바로잡은 위업을 이룩한 거인이었습니다.
6 · 25 당시를 회고할 때, 소련지원으로 중무장한 북한인민군이 소련제 중전차를 앞세워 경무장한 국군을 와해시키고 수도 서울을 점령한 것은 개전 3일만인 6월 28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도를 점령한 공산침략군은 한강 남쪽으로 우리 군을 급추격하지 않고 전승에 도취해 3일 동안 '72시간'을 서울에서 무위 낭비했었습니다. 남북노동당의 대남침계획에 있어 북한의 정규군인 인민군이 수도 서울만을 점령하면 이에 호응한 남노당은 20만 당원을 봉기시켜 한수이남 지역에서 이른바 '영합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완전 적화시킨다는 그들의 침략흉계였습니다. 남북노동당의 합의된 침략이었고 합작 적화계획이었으며, 이는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의 대 한국침략전쟁 지원의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북쪽 공산권의 흉계와 더불어 시공을 투시한 우남의 혜안은 6 · 25 전쟁 이전 남한에서 준동하던 남노당 조직을 사전 분홰하였고, 군내에 침투한 공산조직을 숙군을 통해 색출, 척격했으며 남한 내 각지에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공산무장세력을 철저히 소탕함으로써 한수이남에서 남노당의 봉기 흉계를 사전에 좌절시켰습니다.
이로써 결국 '호응 · 봉기' 없는 72시간을 낭비한 침략군은 서울 점령 3일 후에야 한강을 넘어 공격을 다시 재개했으나, 그 결과는 우리 군과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인 낙동강 전선에서 침략군 저지에 성공케 했고, 우리에게 있어 귀중한 '72시간'은 부산항을 이용하여 미군과 유엔참전군의 병력과 전쟁물자를 상륙시키는 시간을 벌게 했으며, 전선의 과도한 신장으로 탄력을 잃은 침략군은 스스로 그 전력이 악화되었습니다.
■ 현명과 탁견에 의한 용기있는 행동, 우리는 배워야 이 전기를 포착한 한국군과 미군은 인천 상륙전에 대를 맞추어 총반격을 전개함으로써 38선을 돌파하고 적도 평양을 점령하였으며, 북진을 계속하여 염원의 통일을 이루게 된 듯 했습니다.
이는 우남의 현명과 그 정략과 전략이 미국을 움직여 이룩한 한 · 미합작의 위대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40만이 넘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의 후퇴와 그 후의 정전협상, 그리고 1952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선거공약인 '정전'으로 인해 통일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우남은 우방이며 전우인 미국에 대하여 '통일없는 정전'을 격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국제법 지식이 풍부한 우남 스스로 국제법을 어기면서, 반공포로 석방의 극한 수단까지 단행하면서 '통일없는 정전'을 반대 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남은 정전 후에 대한 치밀한 밑그림을 그려 미국으로부터 '한 · 미 상호방위조약'과 20개 사단, 60만 명으로의 국군증강, 그리고 전후 부흥을 위한 원조를 이끌어낸 성과는 오로지 우남의 현명과 탁견에 의한 성과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바로 오늘의 조국번영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나라의 혼란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는 오늘의 한국, 내일의 대한민국을 걱정하면서 언제나 국민과 군과 같이 계시던 영명하신 우남을 새삼 그리게 합니다.
위대한 건국대통령이신 우남 李承晩 박사의 영혼이 편히 잠드시게 하는 길은 오늘을 사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의 단결과 현명한 판단과 용기있는 행동, 또한 친구와 적을 가리는 분별이 절실히 요구되며, 이것이 숭고한 우남 정신을 재현하고 이 나라의 부강을 보장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신 李承晩 박사를 추념하면서 부디 편히 잠드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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