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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과 미국의 퓨리타니즘

Joyfule 2020. 4. 8. 05:40

李承晩과 미국의 퓨리타니즘

 

정성화 ㅣ 명지대 사학과 교수

 

 

미국적 생활방식이 성공모델

19세기말 일본과 서구열강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의 광풍이 한반도에 몰려 온지 벌써 백 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군사혁명 등을 거치면서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엄청난 희생을 치루며 불행한 한 세기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이하는 오늘날 우리 주변의 상황은 아직도 당시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어시아 등 제국주의시대에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던 국가들이 아직도 한반도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내적으로 우리는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지만 구한말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부정과 부패, 국론 분열과 지도력 부재 등으로 방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변에 여전히 강대국들이 포진해 있고 내적으로도 난관에 직면해 있는 대한민국호는 동북아 정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힘없는 나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서 우리가 19세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자명한 것은 우리가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세계 초일류국가로 발전하길 원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존경과 신회를 받으며 살아가길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사의 어떠한 전례를 따라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어느 국가가 우리의 성공모델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짧은 역사임에두 불구하고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의 성공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492년 콜럼부스가 발견한 아메리카 신대륙은 17세기 중엽부터 대서양 해안 주변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단 기간에 강대국으로 등장햇다. 초기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동질적인 이념을 지닌 뛰어난 개척자들이었다. 이들은 근대유럽의 사회적 부패와 엄격한 계급제도에 환멸을 느낀 이민자들로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험난한 대서양을 건너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이들은 신대륙의 거칠고 황량한 자연 속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엄격한 금욕생활을 통해 자유, 평등, 민주사회를 추구하며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목표는 새로운 국가건설이었다.

 

이를 위해 자신들의 종교 이외에는 다른 모든 개신교들을 철처히 탄압하고 배격함으로써 관용이 부족하고 비타협적이며 심지어 독재적이라고 비판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자유는 제한되었지만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데 성공해 오늘날의 미국을 이룩한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미국 발전의 견인차적 역할을 한 정신을 뉴잉글랜드 생활방식(New England way of life) 혹은 미국적 생활방식( American Way of life)으로 표현한다. 물론 미국적 생활방식이란 말하는 사람에 따라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사전적 의미는 오늘날의 강대국 미국을 탄생시킨 청교도적이며 민주적인 개척정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독립 위해 미국을 철저히 이용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전통의 미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미국적 생활방식을 채택해 전진적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쌓인 피로가 누적되면서 사회를 결속시키고 유지시켰던 건전한 가치관들이 사라져 버렸다. 세계적으로 높은 이혼율과 낮은 출상율에서 나타나듯이 가정은 파괴되고 도덕은 추락하며, 부정과 부패는 사회 거의 모든 방면에 실핏줄처럼 파급되어 만성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를 이끄는 건전한 정신적 동력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적 생활방식이야말로 세계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여는 우리에게 중요한 도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필자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필자가 李承晩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李承晩은 미국적 생활방식을 일생을 통해 온 몸으로 구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구한말 개화기에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신흥우 등 많지 않은 선각자들이 해외에 유학해 발달된 서구문물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이중에서도 특히 李承晩은 단연 두닥을 나타낸 인물이다. 어린 시절 유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한학을 배운 그는 배재핟앙에서 약 2년간 서학을 배우고,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신학, 정치학, 국제법, 역사학 등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유교적 전통을 배격하고 기독교에 바탕을 둔 서양문명을 전면적으로 수용해 장차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그는 미국사를 공부하며 기독교와 민주주의 등 미국 건국의 토대가 되었던 미국적 정신, 즉 미국적 생활약식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귀국 후 李承晩은 기독교의 복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마치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종교적 이념으로 철저히 무장해 국가를 건설하려는 것과 같이 李承晩은 기독교의 복음을 통해 몽매한 국민들을 일깨우고 나라를 구원하려고 했다. 그는 전국에 YMCA를 조직하고 청년들을 통해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보급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가열됨에 따라 불가피하게 고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하게 되었다.

 

망명 시절 李承晩의 행적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교훈으로 남기고 있다. 李承晩에게 독립은 절대 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은 철저히 우리의 독립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고착되었고 미국정부는 한국인들이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내 한인세력도 미약할 뿐만 아니라 규합도 되지 않았고 재정적인 기반도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치 17세기 퓨리탄들이 국가건설이라는 목적 하나만을 가지고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서부를 개척하듯, 李承晩도 독립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환경 속에서 미국 정계 주요 인물들을 만나 독립을 역설했다. 李承晩은 가난하고 무지한 우리 민족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랄하고 때로는 무모하게 테오도오 루즈벨트, 우드로 윌슨, 프랭크린 루즈벨트 등과 만나 일본의 침략야욕을 비판하고 한반도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다.

 

강력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

李承晩은 맹목적인 친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을 철저히 이용했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일본이나 러시아의 궁극적인 침략야욕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을 때에는『일본 내막기』와 같은 저서를 통해 이들을 교육시키며 일본의 숨겨진 야욕을 알렸다. 그는 우리의 국익을 위해 철저히 상대국을 이용한 비스마르크와 같은 현실주의적 정치가였다. 그는 미국의 정책이 우리의 국익과 상반될 경우 과감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예는 李承晩의 미군정 정책에 대한 비판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에 포로해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 성향 때문에 해방 직후 미군정은 그보다는 온건한 김규식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호했고 나아가 한국전쟁 중에는 그의 암살도 계획했던 것이다.

 

李承晩은 어린 시절 유교식 교육을 받았지만 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유학하기 전에 이미 자유와 평등이라는 서구적 개념을 이해하면서 근대 민주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수십 여년 실제 미국에서 뿌리를 박고 생활함으로써 자유, 평등,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 서구의 근대적 정치개념들을 배우고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국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메이플라워맹약을 토대로 강력한 합의체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빈면에 李承晩은 일생동안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를 우선시 하는 비민족적이고 독재적 정치체제라고 극렬히 비난했다. 이러한 신념 하에서 李承晩은 한반도에서 제왕적 전근대적 통치제도를 철폐하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李承晩은 강력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높은 문맹율과 빈약한 경제력 등 우리의 의식 수준과 교육수준에 비추어 볼 때 자유민주주의 정체를 도입한다면 오히려 사회적 혼란만 초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李承晩의 판단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지만 동시에 민주적 역량이 부족한 지역에 대해서는 일시적 신탁통치가 효율적일 수 있다는 윌슨의 주장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李承晩은 독립 이후 우리의 정치체제에 대해 입헌 군주제나 강력한 대통령제를 제시했던 것이다.

 

청교도적 정신을 행동으로 옮긴 지도자상의 좋은 본보기

해방 직후 귀국한 李承晩은 국내 뚜렷한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강력한 지원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李承晩은 북한은 물론 남한 내에서도 심각한 저항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李承晩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단기간에 정적들을 제거하고 강력한 통치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48년 건국 이후 李承晩은 겉으로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李承晩이 비록 한편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희생시켰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건설이라는 대업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의 후진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후진적 한국을 통치하는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로는 불가능함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운명은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었다. 이에 李承晩은 국가건설이라는 절대 절명의 과제를 완성하기 위해 공산주의와 절연하고 자유주의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李承晩의 선택은 17세기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청교도들의 비록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정착했지만, 이들은 정착 이후 눈앞에 당면한 국가건설을 위해 정치적 타협이나 종교적 관용을 배제하고 철저히 투쟁으로 일관해 마침내 강대국 미국의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미국 건국의 초석이 된 청교도정신은 바로 정직하고 근검한 생활의 대명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청교도정신은 지난 3세기 동안 미국인들의 일상행활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우리의 근대사는 어떠한가? 구한만 동학혁명을 야기한 전라도 고부군수의 탐욕은 오늘날에도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부정부패로 재생되어 부패공화국이라는 긴 오욕과 수치의 역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李承晩이 일생을 통해 실천한 근검한 생활은 우리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고 있다.

 

李承晩은 약소국의 백성으로 태어나 나라를 잃어버리고 미국에서 고립무원 속에 독립운동울 전개했다. 해방 후 그는 종교, 정치, 문화, 교육 등 모든 방면에서 지극히 폐쇄적인 우리 사회에서 누구보다도 청교도적 생활방식을 채택해 철저히 행동으로 실천한 인물이엇다. 혼란한 이 시기에 우리나라를 세계적 강대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건국을 이룩한 청교도적 정신과 미국적 생활방식을 적극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청빈하고 개척자적 청교도상을 몸소 실천한 李承晩은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차세대 지도자들에게 귀중한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