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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 '선포한 우남의 선견지명

Joyfule 2020. 4. 15. 02:47

이혜복 ㅣ (사)대한언론인의 상임고문 · 제1공화국 시절 동아일보 사회부장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추억은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분은 애국자로서의 면모, 정치가로서의 백년 앞을 내다보는 탁월한 통찰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한국전쟁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던 1953년 초 봄, 스탈린이 죽자 소련은 휴전을 제의했고 서유럽 민주우방 역시 2차대전 후 복구계획이 지연될 것을 염려, 전쟁의 장기화를 꺼렸다. 미국 내 여론도 '전쟁 조기 종결'로 돌아서 "한국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전에 한국전선을 시찰, 휴전방침을 굳혔던 것이다. 그래서 휴전회담은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어 조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붕괴 직전의 북한공산정권을 도와 불법 개입한 중공군 수십만이 그대로 한반도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정전을 불가하다"고 단호히 '통일없는 휴전 반대'의 강경한 메시지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이 1953년 4월 26일이었다. 뒤미처 이 대통령은 '휴전 불수락' 정부 방침을 미국정부에 정식 통고(5월 8일)하였고 변영태 외무부장관 명의로 '한미방위조약 등 휴전수락 4개 전제조건'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였다. 이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정부의 '태도완화' 를 요청(6월 7일)해 왔다. 그때 이 대통령은 "현상태 하에서 휴전이 성립될 경우 UN군 사령관 휘하의 한국군을 철수하겠다"고 클라크 사령관에게 통고(6월 19일)하였고, 이보다 하루 앞선 6월 18일 UN군 포로수용소에 묶?여 있던 반공포로 석방을 명령, 그 중 2만 5천명을 탈출시켰다. 이러한 돌발사태로 조인 단계의 휴전협정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급해진 미국정부는 어떻게든 이 대통령을 설득해 보려고 로버트슨 미국무차관보와 콜린스 미육군참모총장을 서울로 급파하였다. 그것이 1953년 6월 25일이었다.

 

그후 1주일동안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는 연일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 끈질긴 설득작업을 펼쳤다. 그때 나(당시 경향신문 기자)도 경복궁 앞 노상(신무문 밖)에 대기했다가 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로버트슨 차관보와 노상 인터뷰를 되풀이 했다.

 

하루는 경무대를 나온 로버트슨 차관보가 "오늘은 할 얘기가 없다"고 자리를 뜨려하자 "그게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 대통령이 꽉 입을 다물고 선채로 30분동안 묵묵부답이라 되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날 신문 제목은 '침묵회담' 으로 제목이 나가기도 하였다.

 

결국 7월 15일, 이 대통령의 친서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그 후 미국정부의 '한국지원 계획'이 줄지어 발표되었다. 마침내 7월 25일 한 · 미 두 정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은 조인되었다. 그 얼마후인 8월 1일 한 · 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 되었고 그해 10월 1일 워싱턴에서 상호방위조약은 정식 조인되고 그 해 11월 27일 발표되었다. 한 · 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배경에는 국가생존과 자유수호를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수완과 단호한 정치적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휴전협정 이후 제네바에서 막을 올렸던 남 · 북정치협상이 북한측의 비협조로 결론없이 끝난 채 오늘날까지 한반도는 휴전선으로 양분되어 있다. 끈질긴 휴전상태의 지속이다. 그동안 북한 공산집단의 무수한 휴전협정 위반사건(무장공비 남파, 땅굴 굴착, 청와대 습격, 아웅산 테러, 서울올림픽 방해를 위한 KAL여객기 폭파 등)이 거듭됐지만 감히 대규모 군사도발을 감행하지 못한 것은 한 · 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한미군이 휴전선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반세기 후에 닥칠 군사태세에 대비, '한 · 미상호방위조약' 이라는 굳건한 방벽을 미리 구축해 놓았던 것이다.

 

또 이 대통령은 6.25전쟁중 수시로 전선부대를 위문, 일선장병을 격려했고 특히 엄동설한에도 전선방문을 계속했다.

 

종군기자였던 나는 여러번 이 대통령 전선방문을 수행, 취재한 경험이 있다. 80 노령의 이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 열변을 토하며 장병들을 격려하는 모습, 이에 호응하는 장병들의 충천하는 사기를 실감하였다. "한나라의 지도자는 저러해야 한다"는 감동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은 1953년 봄, 전선 도처에서 혈전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서울에 잠시 들른 이 대통령이 경무대 앞뜰로 서울 주재 기자들을 불러들여 홍차 한 잔씩을 나누며 "여러분, 수고가 많다"고 격려했던 일이다. 그분은 마치 정다운 할아버지 같이 젊은 기자들을 위무하며 "나라 위한 언론인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나라 구석구석을 보살펴 국민 모두가 나라 위해 함께 일어서게 힘을 실어주는 지도자, 그런 분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든든한 기초를 다져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될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는 '평화선' 선포에 관련된 것이 있다.

 

1952년 1월 18일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휴전협정 성립으로 지금의 군사경계선이 확정되기 훨씬 전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해안 수역에 있어 한국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규정하는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였다.

 

원래 명칭은 해양주권선이었으나 이 대통령이 선포햇다고 해서「이승만 라인」으로도 불리다가 이 선을 선포한 이유가 인접국가 사이의 「평화유지」를 위해 설정한 선이기 때문에 「평화선」으로 개칭 되었다.

 

이 평화선 설정목적은 한국수역 안의 해산물에 대한 보호와 관리 및 이용에 있으며 공해상의 외국선박의 자유항행권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평화선의 지도상 좌표는 ① 함북경흥군 우암령 고정에서 북위 42도15분, 동경 13도45분의 점에 이르는 선. ⓩ 북위 42오 15분, 동경 130도 45분의 점에서 북위 38도 동경 132도 50분의 점에 이르는 선. ③ 북위 38도 동경132도 50분의 점에서 북위35도 동경 130도의 점에 이르는 선, ④ 북위 35동 동경 130도의 점에서 북위 34도40분 동경 129도 10분의 점에 이르는 선. ⑤ 북위 34도40분 동경 129도 10분의 점에 이르는 선. ⑥ 북위 32도 동경 127도의 점에서 북위 32도 동경 124도의 점에 이르는 선. ⑦ 북북위 32도 동경 124도의 점에서 북위 39도45분 동경 124도의 점에 이르는 선. ⑧ 북위 39도45분 동경 124도의 점에서 평북 마안도 서단에 이르는 선. ⑨ 마안도 서단에서 북으로 한 · 만국경의 서단과 교차되는 직선으로 되어있다.(지도참조)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한 이유는 장차 휴전이 성립되어 UN군이 설정했던 한반도 해역의 '해상봉쇄선'이 해제되면 전쟁기간중 어로행위를 못해 각종 어류가 풍부한 한국 해역으로 인접국가(일본. 중국)의 어선들이 몰려들 것이 뻔했으므로 이를 미리 막기 위한 선제적 방어 조치였다.

 

과연 휴전이 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본 어선과 중국 어선들이 우리 해역(평화선 안쪽)으로 떼지어 몰려들었으나 그들 어선은 평화선 침범으로 모조리 우리 해군에 나포되어 부산 부두에 배는 억류되고 침범어부들은 모두 부산형무소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나 중국 측 어느 정부도 여기에 대해 항의하지 못했다. 억류된 어부들과 어선은 1958년 5월경에 가서야 모두 풀려났다.

 

국가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선제적인 외교적 조치로 당당히 우리 국익을 지킨 이승만 대통령의 앞을 내다보는 정치 · 외교적 통찰력이야말로 국민이 믿고 따를 수 있는 핵심적 요소가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탁월한 지도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심한 것은 요즘 우리나라 국어사전을 뒤져 봐도 「평화선」이라는 낱말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국민의 역사인식이 모자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