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대통령
이동현(李東炫)_전 중앙일보 기자
가방 4개가 전부였던 하와이행 이삿짐
1960년 5월 29일 오전 8시 30분. 약 한달 전 대통령직에서 하야한이승만 박사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태운 CAT(B-1004호) 항공기가 김포공항을 출발, 미국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향했다. ‘늦어도 한두 달 후에 돌아올테니 집 좀 잘 봐달라’며 측근들에게 당부하고 떠난 길이 5년 2개월간 ‘망명 아닌 망명’이 될 줄은 두 사람 모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시 이 박사 부부가 소지한 짐이라곤 옷가지를 담은 2개의 트렁크와 약품과 마실 것, 샌드위치 등이 담긴 상자 하나, 그리고 평소 쓰던 타이프라이터 등 가방 4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 박사 부부의 출국 직후 국내에선 이들의 재산도피 문제가 커다란 화제거리로 등장했다. 전세 비행기를 얻어 단 둘이 비밀리에 떠났으니 재산도피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을 게 아니냐는 등 온갖 추측과 소문이 난무했다. 당시 주요 일간지들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그의 측근들과 신임이 두터운 외교관들을 통해 재산을 관리해왔다”느니 “전 주일대사 유태하(柳泰夏) 씨 명의로 홍콩(香港) 등지의 외국계 은행에 2천만 달러 이상을 빼돌렸다고 외신이 보도했다”는 등 확인도 안된 내용들을 마치 사실인양 보도해 의혹을 더욱 부추겼다.
재산도피•부정축재 입증 증거 없어
이 박사가 출국한 지 4일만인 6월 2일 동대문경찰서는 이화장(梨花莊) 내에 숨겨놓은 재산이 없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황규면(黃圭冕) 전 재무비서관이 갖고 있던 열쇠로 이화장 내 캐비넷들을 열어보았지만, 세간의 의혹과는 달리 통장이나 현금은 일체 나오지 않았다. 거기에는 대신 이 박사가 독립운동 시절부터 틈틈이 메모한 수첩•서신 등이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연대기 순으로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그럼에도 국회는 6월 7일 민주당 정일형(鄭一亨) 의원의 제안에 따라 ‘이 박사 재산도피 위원회’를 구성한 데 이어, 허정(許政) 내각수반이 이끄는 과도정부는 6월 21일 ‘전 대통령이승만 박사와 전 민의원 의장 이기붕 씨 및 그 가족들의 재산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특정재산조사위원회’(위원장 金容甲 당시 재무차관)가 구성되고, 사세청(司稅廳•현 국세청)이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사세청은 약 한달간에 걸친 정밀조사에도 불구하고 이 박사의 해외 재산도피와 부정축재 등에 관한 소문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 박사의 재산은 이화장(대지 2천평•당시 시가 약 3억환)과 세계통신사옥(대지 70평•시가 1억 환) 등 두 개의 부동산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들이 사는 데야”
한편 하와이 도착 직후 윌버트 최씨의 별장에 머물다 6개월 후 그가 마련해준 마키키가(街)의 한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긴 이 박사 부부는 국내에서 나돌고 있는 소문과는 너무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의 건강』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의 생활은 몹시 단조로웠어요. 나는 예전에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나갔지요. 우리를 도와주는 동지들과 제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했어요.”
이 박사 부부의 당시 생활은 한마디로 ‘독립운동을 벌이던 시절’과 같은 쪼들린 생활이었다. 마키키로 거처를 옮기던 날, 교포들은 자신들이 쓰던 가구와 주방기구들을 하나 둘씩 가져와 살림살이를 장만해 주었다. 지금도 이화장에 전시돼 있는 가로 1백 20㎝, 세로 90㎝ 정도 되는 호마이카 식탁은 너무 초라해, 이국땅에서 망명의 설움을 달래는 노(老)대통령 부부를 위로하러 이곳을 찾는 교포들의 마음을 안쓰럽게 했다.
이 박사는 식사 때마다 이 식탁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렸고, 조국의 장래를 늘 염려했다. 고국에 돌아가고픈 생각이 간절할 때면 서쪽을 가리키며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들이 사는 데야” 하며 멍하니 서편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돈 다 쓰면 서울에 못가"
이곳에서의 생활은 전적으로 교포들과 평소 李박사와 친분이 있던 미국인들이 보내주는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자연히 검소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박사는 5달러 하는 이발비를 아끼기 위해 머리가 길어도 이발소에 가질 않았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아무리 권해도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이 박사의 이발은 프란체스카 여사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생활하는 노 대통령 부부의 모습은 많은 교포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매주 금요일마다 식료품을 구입하러 시장에 갈 때면, 이 박사는 언제나 “남은 게 있는데 뭐 하러 가냐”며 한사코 시장에 가지 못하게 했다. 그때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굶고서는 살 수 없잖아요” 하며 조용히 반문하곤 했다. 그러면 이 박사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 조금만 사와. 돈을 다 써버리면 서울에 못가” 하며 프란체스카 여사를 겨우 놓아주곤 했다.
금요일마다 되풀이되는 두 사람간의 실랑이였다. 시장을 보고 현관문에 들어서는 여사의 손에는 항상 작은 봉투 하나만 들려 있었다. 행여나 물건을 많이 사지 않았을까 매번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는 이 박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곤 부엌에 달린 뒷문을 통해 집안에 물건을 몰래 들여오곤 했다.
교포들의 눈물샘 자극했던 구차한 생활
이 박사는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분이었다. 교포들의 피땀 흘린 후원금을 받아가며 수십년간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한푼이라도 잘못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감이 이 박사의 의식 저변에 늘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대통령 재직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나라 살림에 한푼의 달러라도 아끼기 위해 달러 지출을 철저히 챙긴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박사의 평생 지기(知己)이자 조언자로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로버트 올리버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이 박사는 끊임없이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이 박사 부부가 1960년 한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할 때도 가난했다. 그는 수중에 돈 한푼 가진 게 없어 하와이 교포들의 기부금으로 살아야 했다.” 이 박사는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숨겨뒀다 발각된 전직 대통령이나 부패한 정치판에서 아직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얼빠진 정치인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는 누가 뭐래도 청렴한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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