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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참모 총장이 이승만 제거 제의

Joyfule 2020. 5. 13. 18:06

육군 참모 총장이 이승만 제거 제의

再選 불가능

1952년 5월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7월23일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 무렵의 국내외 정세는 李承晩의 再選 가능성을 어둡게 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이 터지고 언론이 정부 비판을 마음대로 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戰時중에도 언론검열을 하지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은 수많은 동료 의원들이 ‘서울死守’란 거짓 방송에 속아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된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반공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鮮于宗源씨는 張勉 총리 비서실장이었는데, 李承晩 반대노선에 서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승만의 거짓말에 속아 서울에 남아 있었던 나의 아버지는 빨갱이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내가 구속시켰던 언더우드 부인 살해범들이 보복을 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승만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휴전을 반대하는 李承晩은 점점 극동 전략의 장애 요인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51년 후반기부터 국무부나 주한 미군 대사관측은 李承晩 대통령을 대체할 인물로 張勉, 張澤相, 金性洙, 趙炳玉 등 친미 인사들을 리스트에 올리고 암시들을 계속 던지기 시작했다.
재선에 불안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51년11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183 대 19로 부결돼버렸다. 국회가 이런 분위기라면 재선은 불가능하다고 대통령은 판단했다. 이 무렵 두 개의 新黨이 탄생했다. 오위영·정헌주·김영선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원내 자유당과 이범석 등 族靑세력을 뼈대로 한 원외 자유당이 그것이었다. 원내 자유당은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상징적 대통령에 李承晩, 실권 있는 국무총리에 張勉씨를 추대할 계획이었고 원외 자유당은 처음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했다.

원내 자유당·민국당·민우회 등 야당연합 세력은 1952년 4월에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발의시켰다. 꼭 개헌정족수인 123명이 서명했다. 한 사람의 이탈자가 생겨도 안 되는 아슬아슬한 세력 분포였다. 정부와 원외 자유당측은 두 번째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이에 맞섰다. 이 팽팽한 무대에 등장한 것이 張勉의 후임 총리 張澤相이었다. 그는 먼저 20여 명의 영남 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신라회를 조직, 국회에 발판을 만들고 혼미한 정국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계엄령 선포, 미국에 도전

李承晩 대통령은 국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1952년 5월25일 0시를 기해 부산을 비롯한 전남북, 경남의 23개 시군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5월26일 부산의 계엄군은 임시 의사당으로 출근하는 국회의원 통근차가 검문에 불응한다고 47명의 의원이 탄 차를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이들 중 서범석 의원 등 5명은 국제 공산당 사건 혐의로 즉각 구속되었다. 2일엔 곽상훈 의원 등 6명이 같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날 오후 4시 대구 육본 회의실에서 열린 참모회의 분위기는 怒氣등등했다.
故 李鍾贊 육군참모 총장의 생전 회고담은 이렇다.

『각 참모들이 브리핑을 하는데 김종면 정보국장이,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공병대 크레인이 끌고 갔는데 쿠데타가 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군이 정치에 이용되어선 안 된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참모들은 자기들끼리 좀더 구체적인 회의를 한 뒤 보고하겠다고 했다. 한 시간쯤 지나니 각 부대에 보낼 훈령을 만들어 놓았다고 보고해서 상황실에 가 보니 칠판에다가 「군대는 동요치 말고 본연의 자세로 국토 방위의 신성한 임무만 다하라」는 요지의 훈령이 씌어져 있었다』
朴正熙 작전국 차장이 쓴 훈령 「육군 장병에게 고함」이 예하 부대로 내려간 5월27일 오후 정례 참모회의를 하고 있는 李鍾贊 총장에게 李承晩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이 장군, 할 이야기가 있으니 부산으로 내려오게』
격한 어조였다. 李 총장은 다음날 밴 플리트 8군 사령관과 같이 임시 경무대에 들어가게 됐다. 李 대통령의 두 눈은 충혈 돼 있었고 顔面 근육은 씰룩거렸다. 李 총장에게 대통령은 『왜 나라에 반역하느냐?』고 추궁했다. 李 총장이 부산지역 계엄군으로 쓸 병력을 배치해주지 않는 데 대한 지적이었다.

李 총장은 『각하! 작전권을 가진 유엔군 사령관의 동의 없이는 군대를 이동할 수 없다는 것,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라고 했다.
李 대통령은 『자네가 날 훈계하나?』고 화를 냈는데 이쯤 해서 밴 플리트 장군이 말려 老대통령은 다소 누그러졌다. 李鍾贊은 미리 써 간 사표를 냈다.
대통령은 『아직 자네만 믿네』라면서 사표를 돌려 주었다.
부산정치파동으로 알려진 이 위기의 본질을 李承晩은 다르게 보고 있었다. 李 대통령의 홍보담당 고문인 로버트 T 올리버가 쓴 ‘建國의 內幕’에 따르면 李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38도선을 없애기 위해 투쟁할 사람은 나 말고 누가 있겠는가? 미 국무부의 意中의 인물인 張勉과 趙炳玉은 다시 분단을 고착시키려는 유엔군의 휴전계획에 대하여 틀림없이 협력하게 될 것이다>

李承晩은 미국의 지원하에 야당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목적은, 李 대통령이 미국의 전쟁수행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휴전회담 자체에 반대하고 있어 장래의 골칫꺼리를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방법이 있다”고 나선 것이 77세의 鬪士였다. 그는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親與대중조직을 동원, 가두시위로 국회를 압박하고, 드디어 계엄령을 선포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국회가 열려 내각제 개헌을 하거나 후임 대통령을 뽑는 일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야당 뒤에 있는 미국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미국 대리 대사의 증언: “육군참모총장이 이승만 연금 제안”

미국 국무부와 군부는 이때 여러 가지 대책을 검토하는데 가장 극단적인 방안은 국군이나 유엔군을 동원하여 李承晩을 감금하고 국회로 하여금 후임자를 선출하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李 대통령으로선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었다. 국군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는 李 대통령에 비판적인 李鍾贊 총장, 李龍文 작전국장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평양출신인 李龍文 준장은 張勉 총리의 비서실장인 鮮于宗源을 찾아가서 “군과 손을 잡고 이승만을 몰아내자”는 제안까지 했다.

부산정치파동 때 있었던 李鍾贊-李龍文-朴正熙(당시 작전국 차장) 라인의 李承晩 제거계획에 대해선 필자가 1984년 6월호 月刊朝鮮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후 여러 편의 논문과 단행본이 발표되었다. 여기선 당시 대리대사 라이트너의 ‘역사 기록을 위한 證言’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소개한다. 그때 미국대사 무초는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 가 있었고, 대리대사 라이트너가 李承晩을 상대했다. E. 알란 라이트너 2세는 1973년 10월26일 워싱턴에서 한 증언에서 李鍾贊 육군참모총장이 자신을 찾아와 중대한 제안을 했었다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李承晩 대통령에게 憲政질서를 회복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親書를 보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李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그도, 우리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게 우리의 약점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한국 육군 참모총장이 지프차를 타고 내가 살고 있던 官舍로 들어왔다. 그는 다른 참모총장들의 의견도 종합하여 말한다고 했다. 그는 국군이 전쟁을 하고 있는데, 후방이 이렇게 혼란해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했다. 행동을 취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수의 군인들과 해병대를 동원하면 대통령, 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을 자택 연금할 수 있다고 말했다. 流血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구속된 40~50명의 국회의원들을 석방하고 숨어 있는 의원들을 나오게 하여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군대가 정권을 장악할 생각은 없고,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군대를 즉각 물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한국의 육군은 유엔군의 지휘를 받고 있으므로 행동하기 전에 미국 정부의 승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미국 정부는 못 본 척하겠다는 말을 나로부터 듣는 것이었다. 미국의 개입은 필요 없었다. 나는 즉각 워싱턴에 전보를 쳐 이 제안을 수락해줄 것을 권고했다. 한국에 있던 유엔위원회에도 이를 알렸다. 그들은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유엔위원회의 호주 대표 프림솔 경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는 다른 대표들과 상의했을 것이다. 나의 참모들도 이것은 좋은 기회라는 데 동의했다>

미군 지휘관들, 李承晩 제거 반대

라이트너 당시 대리대사는 자신이 보낸 電文이 이런 내용이었다고 증언했다.
<이승만을 제거할 千載一遇의 기회이다. 그는 우리와 한국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국회도 누구를 뽑을지 알 수 없다. 4, 5명의 후보들이 그럴 듯하게 거론된다>
라이트너는 워싱턴의 국무부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李承晩을 오랫동안 껴안고 가야 할 것이고 결국은 군사 독재정권을 맞이할 것이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라이트너는 “국무부가 이 문제로 국방부를 상대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란 점을 이해하였다”고 증언했다. 국방부는 일반적으로 전선의 지휘관 의견을 존중한다. 그는 도쿄의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한국의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이 한국의 지도자를 바꾸는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특히, 밴 플리트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것이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부임 직후 李承晩 대통령을 만났다. 배석했던 라이트너는 클라크 장군이 李 대통령에게 “전쟁 수행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유엔군은 국내정치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부산항을 통한 보급로에 문제가 생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李承晩 대통령이 동원한 시위대가 거리에서 보급차량을 방해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경고였다. 요컨대 클라크 장군은 李承晩 정부가, 거리 시위를 조직하지 않고, 일선에서 군대를 빼내는 일만 하지 않으면 묵인하겠다는 자세였다.
라이트너로부터 한국군 육군 총장의 대통령 연금 제의를 보고 받은 미 국무부는 귀국해 있던 무초 대사를 불러와서 대책회의를 가졌다. 결론은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에 개입해선 안 된다”였다. 무초 대사는 나중에 털어놓았다고 한다. 한국군이 李承晩을 연금시키면 국회가 누구를 후임으로 선출할 것인가 알지 못한다는 점이 이 계획의 결정적인 허점이었다고.

라이트너는, 미 국무부가 한국 육군참모총장을 지원하지 않기로 한 또 다른 이유는 국방부와 싸우기 싫어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밴 플리트와 클라크의 이승만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국무부에 보고했으므로 국무부는 더욱 국방부를 설득할 각오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이트너는 사안의 중대상을 감안할 때 국무부가 국방부와 담판을 짓고 안 되면 트루먼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야 했었다고 회고했다.
라이트너는 이렇게 증언을 이어갔다.
<나는 7월4일 독립기념일 파티에 참석한 국회의장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미국 정부는 국회를 지지할 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 직후 국회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李承晩이 당선되었다. 李承晩은 육군참모총장이 자신을 연금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총장은 군에서 추방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무초 가족과 나의 가족이 워싱턴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그때 현명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저 늙은이를 정리할 수가 있었는데...”하고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李鍾贊의 거취

라이트너의 음모와는 별도로 1952년 6월25일 미국 합참은 李承晩이 위험한 행동을 하면 유엔군이 취할 조치를 작전계획으로 만들어두라고 도쿄의 유엔군 사령관에게 지시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이 지시에 따라 이승만 제거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 육군 참모총장에게 육군과 경찰 및 유사 군사 집단의 모든 병력을 장악하도록 명령한 뒤 부산 지역에 직접 계엄령을 선포, 그 업무에 당하도록 지시하라. 정책상 한국군만 동원하도록 할 것. 이상과 같은 사항과 관련하여 한국육군 참모총장의 신뢰도를 평가하여 보고하라.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예방 조치로 50년 7월14일에 유엔군에게 이양한 작전권을 다시 가져 갈 경우를 가상하라>
육군 李鍾贊 참모총장의 신뢰도를 평가하도록 지시한 것은 흥미롭다. 신뢰도 평가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1981년에 조셉 굴든이 쓴 「韓國戰 秘史」에 따르면 『워싱턴-서울 사이에 오고간 여러 전문들은 한국 육군참모총장이 미국과 이승만 사이의 어떤 대결에서도 미국 편을 들 것임을 시사했다』고 썼다.
부산정치파동이 李承晩의 승리로 귀결된 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을 바꿨다. 李鍾贊은 미국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가고, 후임 총장엔 白善燁 장군이 임명되었다.

李鍾贊은 참모 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진해 육군 대학 총장으로 가서 약 7년간 있었다. 4·19 뒤 그는 許政 과도 정권에서 국방장관이 됐다. 李鍾贊 장군이 李承晩에 대한 抗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군복을 벗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군측의 강력한 후원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5·16 군사혁명 뒤 주체 세력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았다. 李鍾贊은 그가 일찍이 「육본 제일의 인물」이라고 간파했던 朴正熙 대통령 밑에서 여러 나라의 대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제2기 유정회 의원으로 지명됐다. 부하였던 金載圭 중앙 정보부장의 끈질긴 설득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李鍾贊은 죽을 때까지 유정회 의원 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多辯家였으나 부산정치파동 때의 역할에 대하여선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