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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일기2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6. 6. 04:26





     감사일기2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짤막한 꿈 속이었다. 오래전에 죽은 그가 나타났다. 곱게 다듬은 잔디같이 짧은 머리였다. 두툼한 볼살의 각진 턱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고 인사했다. 그에게 큰 신세를 졌었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았다. 그는 인자한 얼굴로 나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왜 오래전에 죽은 그가 뜬금없이 나에게 나타난 것일까. 옛날로 옛날로 돌아가 육군본부 검찰관실에서 피의자로 조사를 받는 한 육군 대위가 보였다. 전방에서 소환되어 온 초최한 모습이었다. 그게 나였다. 육군 중령계급장을 단 군검사가 말했다.

“보안사령부에서 자네를 잡아넣으라는 통보가 왔어. 비리정보와 함께 말이야.”

나의 파멸은 이미 예정된 것 같았다. 전두환 정권의 중추는 보안사령부였다. 그곳에 찍혔다면 나는 죽어야 했다. 그 얼마 전 내가 근무하는 지역 보안부대장의 협박이 떠올랐다.

“엄 대위는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가서 한번 맛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그들에게 꽤나 거슬렸나 보다. 친위대같이 행동하는 그들의 전횡에 한마디 했다. 병사에게 사복을 입혀 장교를 감찰하고 오만하게 군림하게 했다. 보안대 중령 앞에서 장군들이 비위를 맞추며 꼬리를 내렸다. 그 보안대 중령이 자기가 어떻게 보이냐고 내게 위세를 과시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육군 중령인 계급장이 보인다고 하면서 상급자에게 예의를 취하라고 했었다. 그런 것들이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한 것 같았다.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단 법무장교 선배인 군검사가 내게 말했다.

“이첩된 정보 내용은 담당사건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냥 빨리 인정하고 조사를 마치면 어떨까?”

그는 진실보다는 어떤 정해진 시나리오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조역에서 빨리 그만두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뇌물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어떤 모략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군내 폭력 사건을 처리한 적이 있었다. 심하지 않았다. 유죄판결을 선고하면 군 생활뿐 아니라 그 인생의 걸림돌이 될 것 같았다. 피해자의 의사를 물어보고 용서할 뜻이 있으면 합의를 하게 하고 관대한 처분을 할 예정이었다. 상해의 정도가 작았다. 피해병사를 만나기 힘들었던 가해자의 부모가 나의 사무실에 합의금을 전해주고 갔었다. 그걸 뇌물로 만든 것 같았다.

돈이 간 곳을 확인하면 바로 진실이 규명될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기야 진실보다는 피해자의 입을 막아 죄를 조작하기도 하는 그런 시절이기도 했다. 주위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늪 속에서 빠져나오기가 막연했다. 나는 조서에 서명하는 걸 거부했다. 시간이 흐르고 조사실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였다. 그가 슬며시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나는 너의 결백을 믿어. 그렇지만 높은 놈들은 너를 희생양으로 만들려고 해. 내가 활로를 뚫을 테니까 힘내. 내가 지금 네 대신으로 살아날 수 있는 진술서를 만들고 있으니까 가만히만 있어. 내가 배경과 내막을 알고 있으니까.”

진흙탕속에서 질식하는 내게 그는 삶의 줄이 되었다. 그가 용감하게 관계자들을 설득해서 나를 늪에서 건져주었다. 후일 그는 민완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너무 뛰어나면 시기와 질투를 받고 모략의 그물이 날아오기 마련이다. 그도 그 그물에 걸려 허덕이는 것 같았다. 한번은 같이 밥을 먹는데 그가 앞에 놓인 숯불 위에서 노릇누릇 구워지는 고기를 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가족과 함께 이런 맛있는 걸 먹으면서 웃고 떠드는 게 행복 아닐까? 내가 검사 뼈다귀를 타고 난 것도 아닌데 출세에만 몰입했었어.”

그는 검사의 옷을 벗고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암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후 머리털이 다 빠지고 젓가락같이 말라버린 그를 만났다. 나도 아프다고 했다. 그 말이 그를 위로해 줄 것 같았다.

그는 자기 병실로 돌아가 꼼꼼하게 자료를 뒤져 내게 효과가 있을 약품을 전화로 알려주었다. 죽어가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그는 큰 그릇이었다. 그 그릇이 깨질 때가 된 것 같았다. 고통이 닥치자 그는 의사에게 죽여달라고 애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 영정사진 속에서 그는 서글픈 표정으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연기가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화장장 소각로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다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신세를 갚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일생에 감사했던 일들을 찾아 쓰려고 시작 하니까 그가 갑자기 나의 꿈속으로 찾아왔다. 그가 지금 저세상에서 어떻게 지낼까 궁금하다. 이 세상에서는 그의 동생이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