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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전래와 여성 - 5. 활동 및 사업 (전도)

Joyfule 2007. 1. 24. 00:58

2) 전도

처음부터 개신교는 종교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신중함을 보인다. 알렌이 닦아놓은 터전 위에 몇몇 성급한 선교사들도 있었지만46) 그런대로 천주교식의 직접적인 전도방법을 비난하면서 교육,의료사업 등을 통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했다.

 

스크랜톤 여사는 1886년 보고서에서 "처음에 우리는 상당한 의심을 받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한다. 그들은 우리가 선하고 악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비록 우리의 계획들에 관해서는 많이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만 말이다."라고 쓰고 있다.47) 이러한 상황 진단 아래 스크랜톤 여사는 조심스럽게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파해진다.

 

1887년에는 "시간이 왔다"라는 판단한다. '나는 종종 이 사람들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고 느낀다."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서 그들을 가르친다면 매우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나는 가능한 한 빨리 한국의 가정들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에 관해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할 것이다."48)

 

그런데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에 능통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언어에 그다지 능치 못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스크랜톤 여사는 한국어가 서툴렀기 때문에 한 남자선생으로 하여금 부녀자들에게 설교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외법이 심하던 한국의 관습으로 부녀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생각 끝에 방 가운데 휘장을 치고 서로 얼굴을 못보게 하고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게 하였다"49)고 한다.

 

따라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과 그들의 언어적 능력의 결핍은,그리고 여성들이 은둔되어 있는 한국의 상황은 여선교사들로 하여금 전도부인(Bible Women)을 쓰게 하였다.

그녀들이 전도부인을 어떻게 택하였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주로 그녀들을 사적으로 돕던 한국여자들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서신에서 선교사들의 요리사가 전도부인이 된 경우를 볼 수 있다. "전도부인을 훈련시키는 부인 성서 학원(Women's Bible Institute)이 곧 열릴 것인데,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등록할 것이다. 그중에서 우리의 현재의 요리사도 올 봄에 그 학원에 입학할 것이다. 그녀는 매우 영리하기 때문에 훈련을 받으면 훌륭한 전도부인이 될 것이다."50)

 

전도부인들은 다른 훈련보다는 주로 성경을 많이 읽는 훈련을 받았다.
"내가 한 전도부인에게 얼마 전에 '성서'를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보자 그녀는 '100번'이라고 답했다.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마가와 교리문답9Catechism)외에는 번역한 것이 없다."51)

따라서 전도부인들이 전한 복음을 별로 신뢰할 수 없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많은 여성들이 교회로 오고 있지만,여자 설교가들(evangelists)들은 그렇게 크게 요구되고 있는 아주 초보적이고 간단한 가르침조차도 가르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인들을 좀더 훈련시킴으로 우리의 영향력을 증가시켜야 한다."52)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말을 유능하게 잘하지만,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능력이 약하고 질문의 가치에 대해서 중요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전도부인들의 가르치는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실제적인 훈련을 시켜야 한다."53)

 

이러한 한국 여성들의 지도력의 결여에 대해서는 상당히 후기까지도 불평을 토로하고 있다. 1934년 12월 19일자 서신에 보면,"23년 전 내가 광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 토착여성들은 훌륭한 헌신적인 기독교인들이라고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몇 천년간 내려온 제한된 사회적 권리, 거의 완전한 문맹,남편, 남자형제, 아버지에게의 종속들을 통해 발전된 열등 컴플렉스를 아직 내던지지 못하고 있었다."54)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왜 직접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준비를 충분히 갖추지 않고 일을 시작했는지를 물을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들은 피선교국의 상황에 대한 철저한 분석없이, 다만 개인의 종교적인 회심이 계기가 되어서 선교사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피선교국이 중국이든 일본이든 조선이든 별 상관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들의 문화, 전통에서 생긴 가치관에 입각한 복음해석과 서구적 문화를 표준으로 하는 윤리관을 가지고 전도를 한 것이다. 그들의 헌신적인 자기 희생을 높이 평가한다. 하더라도 다른 문화에 대한 존경의 결핍, 유대 기독교 이외의 문화와 역사 안에서도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겸손히 찾아보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며, 함께 살 수 있는가를 서로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 한 독선도 일단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런 반성을 거치지 않은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열은 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19세기의 자본주의, 시민주의 세계팽창의 조류에 협조하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55) 해링톤에 의하면 선교사들은 먼저 미국 문명을 가르치고 나서 기독교가 바로 서양문화의 기본이라는 것은 성급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며, 그들의 잘 사는 생활양식을 호기심과 선망에 찬 한국인들에게 과시했다는 것이다.56)

 

여선교사들의 전도활동 역시 이러한 차원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지위에서 해방된 여성의 표준을 기독교적 여성, 즉 남편과 시집의 학대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믿는 여성, 또한 기독교적 결혼과 서구식 의생관념을 가지고 가정을 관리하고 영위하는 여성에게 두었다. "기독교계 학교의 졸업생들은 집안을 청결하게 하고 아이를 깨끗이 키우며 정님이는 일주일에 한번 목욕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57) 라고 자랑스럽게 쓴다.

 

"성서는 기독교적 가정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이에 여성들은 남편과 나란히 교회에 가며, 그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허용된다. 넉넉한 계층의 여성들은 더 이상 자신을 여성의 영역에다 감춰두지 않아도 되며 어떤 계층의 젊은 여성들도 걸어갈 때 머리에 긴 코트를 걸치지 않아도 된다..."56)

기독교인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남편과 평등한 목소리를 가진다고 하며 자기들이 아는 미국의 부인과 동일한 평등과 선한 의지의 정신을 가지고 대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부인상이었다. 즉 종이 아니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부인상을 말하는 것이다.59)

 

이렇게 여선교사들은 전도부인과 함께 돌아다니며 전도를 했고 모이는 수가 늘어나면 교히를 지었다. 즉 "조그만 방 한칸으로부터 시작된 성경공부는 날이 가고 달이 감에 찾아드는 사람이 늘어 스크랜톤 부인은 드디어 학교 외에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부녀자와 소녀를 위한 여성교회를 동대문에,그리고 1895년 6월 20일에는 남대문 부근에 상동교회를 설립하고 서울은 물론 지방에까지 전도여행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사업을 발전시켰다.60)

 

아뭏든 여선교사들이 전도부인을 데리고 전도를 하러 다니는 광경을 우리는다음의 편지에서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원씨(Mr.Winn)의 포드로 화요일 아침 10시 15분경 전주를 떠났다. 우리는 차로 150리를 갈 수 있었으므로 릭샤(ricksha,인력거)나 가마로 가는 것보다 하루의 여행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무리중에는 원씨와 그의 조수가 있었고, 에밀리,나 그리고 전도부인이 짐을 가지고 있었다. 경치는 아주 아름다왔다. 산과 들 주위는 신선하고 아름다왔다. 우리는 오후 1시 30분쯤 되어 여행을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길을 갈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므로 몇 번이나 멈춰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고 그들에게 집에 가서 읽을 소책자들(tracts)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소책자들을 건네주는 일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그것들을 받기를 두려워했다. 나는 그들이 우리들에게서 이상하게 보이는 종이뭉치를 받으면 무시무시한 병이 옮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했다고 추측했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들이 악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 책들을 가져갔고, 따라서 나는 말씀이 그런 식으로 퍼져 나가리라고 희망한다.


나는 단지 그들을 보고 미소지으면서 'pe-se-o'(펴세요...제발 읽으세요를 의미하는)를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웃으면서 가져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나는 안 만질 거야,그것은 더러워''이 새 교리를 치워 버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남원에 오후 2시 30분 경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에다 자동차를 남겨두고 30리나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에밀리와 나는 릭샤 (ricksha 인력거)를 탔고 원씨와 조사들은 걸었다....

 

그곳 교회의 지도자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우리는 여기서 토요일 아침까지 지낼 것이다...
이곳 교회는 반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 쪽은 여성을 위해서,한 쪽은 남성을 위해서였다.
우리는 지도자의 부인의 집까지 가서 앉아 불을 피울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온 마을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와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거칠거나 해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예배 후에도 우리 주위를 배회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마지막 한 사람이 다 갈때까지 인사를 하고 또 했다....


아침식사 후 여성들을 위한 아침 반이 모이기 시작했고 여자 20명과 아이들 10명이 모였다....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또 다른 예배가 있었는데 여자 21명과 아이 16명이었다. 후에 에밀리는 전도부인과 함께 마을로 가서 여자들을 찾아다녔고 아이들에게 요한3장 16절을 가르쳐 주었다고 내게 말해 주었다..."61)

 

이런 교회들에서는 여성을 위한 성경반(Bible Class)을 만들어 전도 사업을 펼쳐나갔던 것이다. "여성 성경반은 먼 거리에서부터 오는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서에 대한 열흘간의 집중적인 공부를 했고,442명 정도가 등록했다. 그들은 거의 끝까지 잘 해나가서 378명이 마쳤다. 이 여성 성경반은 우리의 선교를 위해 아주 중요한 것이다."62) 이렇게 성경반을 만들어 가르칠 때, 선교사들은 많은 여성들이 이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어떤 여인도 '누구 누구 부인'이라든가 '누구 누구 할머니'라든가 '이런 저런 마을에서 온 부인'이라든가 '돼지 할머니'라든가 '마을의 강아지의 엄마'라든가로 성경반에 등록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이름을 갖고 있지 않거나 모르거나 혹은 들어본 기억조차 없을 때 우리는 그녀에게 이름을 만들어 주었다."63)

 

사실상 한국의 여자에게는 단지 어릴 때 필요에 의하여 붙여 준 아명이 있을 뿐이었다. 속칭 젖이름, 작은 이름이라고도 하며 시집가는 날쪽을 지을 때까지 이 이름을 쓰고 그 이후에는 친정의 성에 씨자만 붙여 부르거나 시집의 성에 실(室)자를 붙여 박실, 김실로 부르거나 남편에게 관직이 있으면 그 관명아래 宅자를 붙여 참봉댁,교리댁,벼슬이 없으면 김서방 댁,박서방 댁으로 부르고 그 밖에 친정의 지명,살고 있는 집의 위치 등에 댁자를 붙여 부르기도 한다. 단지 비녀같은 하층계급의 여인은 시집가건 말건 평생 아명으로 불리웠다.64)

 

1934년에 간행된 [숙인 창영 조씨 실기]에 보면 300여명 조문객 중 여자 50여명이 참석했는데,같은 조문객 남자들은 성명,직명이 기재되어 있고,여자 조문객들은 대부분 누구의 자당,누구의 매씨,누구의 조모,누구의 빙모 등으로 여성 자신의 이름보다 누구라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소개되고 있다. 다만 8명만이 여성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65) 따라서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국 여성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지만 이제부터는 자기 이름을 쓸 것이다. 과거에 그녀의 이름은 출생시 한문으로 등록되는 것 외에 다시는 들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들은 처음으로 그들 자신의 주체성과 인격의 중요성을 통찰하게 되었다."66)

 

여성들이 자기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 주체성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이름들이나 서양식 이름들이었다. 마리아, 헬렌,또라... 등등의 서양식 이름들은 이름없는 여성들에게 자기 주체성을 갖게 해주는 과정으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반면에, 기독교가 서구적이라는,외래의 것이라는 이미지를 일반인들에게 심어주었고,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기독교 여성들은 종종 이 사회에서 소외되는 경험을 한다.이런 외래적인 이미지를 벗고 토착화된 우리의 종교로 만들어가는 작업은 어렵기는 하나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