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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전래와 여성 - 5. 활동 및 사업 (3) 의료선교)

Joyfule 2007. 1. 25. 00:34

3) 의료선교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여겨졌다. 알렌의 경우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의료사업은 복음전파의 선두 주자 노릇을 해내었던 것이다.67) 즉 갑신정변 때 민영익이 받은 상처는 한의사들이 치료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알렌은 한의사들을 옆으로 제쳐놓고 치료하는 일을 시작하였고 이 일로 인하여 알렌은 선교부가 관장하는 병원을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여선교사들이 왕비의 시의로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68)

 

이리하여 1886년에 미국 장로교 본부는 앨러즈 양을 파송하여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중요한 부녀가 사업을 맡아보도록"하였다. 앨러즈 양은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왕비의 궁중 귀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앨러즈 양은 오자마자 곧 왕비의 신임을 받고 친근하게 되었다. 국립병원 안에는 의학박사 호톤(Lilias S.Horton)양이 국립병원의 부녀과의 책임자가 되고 왕비의 신임받는 시의가 되었다.69)

 

이에 비해서 감리교와 함경도를 중심으로 한 카나다 연합교회의 여의사,간호원들의 의료사업은 "제일 불쌍한 계급"을 상대로 시작하여 가장 가나안 사람들을 위하여 시행되었다.70)

 

특히 그 당시의 여성들은 내외법으로 인하여 남성이 여성을 직접 진찰할 수가 없었다. 또한 병든 여인들은 별로 치료를 받지 못했고 그냥 내쫓기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풍속 때문에 병이 난 여자를 치료하거나 기독교를 전도하려면 여의사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닥터 스크랜톤은 여성해외선교히에다 여자와 어린애들만을 따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 달라고 청원했다. 이 요청이 수락되어 1887년에 여성 해외선교회에서는 닥터 메타 하워드(Meta Howard)를 조선에 파송했다. 처음으로 여성을 위한 전용병원이 세워진 것이다. 이 병원은 메리 대치 스크랜톤 여사가 조선에 세운 첫번째 여자학교와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닥터 하워드는 조선에서 수천 명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치료했다. 그 결과 건강이 악화되어 1889년에는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는 바로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조선에 온 것이다.71)

 

로제타 셔우드는 1890년 10월 13일자 일기에서 그 당시의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도착 첫날 병원을 가보았는데 집에서 가까왔다... 병원과 시료원을 돌아본 나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기 때문이다. 약간 구조를 고친 조선집이었지만 보기에도 훌륭하고 병원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방들은 온돌이며 환자들은 따뜻한 방바닥 위에서 쉬고 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할 때는 바닥에 앉아야 하므로 습관이 될 때까지는 이 자세가 매우 힘이 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런 방법이 좋은 것 같다. 첫째 이유는 환자들이 조선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양식 침대는 매우 춥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해롭지 않은 풍속을 고쳐야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방바닥이 따뜻해서 잠자기에는 참으로 편안하다. 둘째는 환자가 침대 밖으로 나올 염려가 없다. 방 전체가 하나의 침대나 마찬가지니까. 세째는 온돌방은 청결하여 소독하기가 매우 쉽다... 병원에는 약품이 꽤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72)

 

로제타 셔우드에 의하면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이 대부분 하층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상류층의 여성들은 대낮에 거리를 나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그녀는 "밤에도 병원문을 열어 어떤 계층의 여자 환자라도 치료를 받도록 하고 싶다"고 하였다.73)


그러다가 로제타 셔우드는 홀(W.J.Hall)의사와 결혼하고 평양에 파송되어 거기서 선교병원을 개설하였다. 서울 부인병원의 일은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가 후임으로 맡게 되었다. 홀 의사는 1892년에 평양에서 의료사업을개설하였고 아내 로제타는 1894년 5월에 평양에서 부인병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감리교 평양의료사업은 청일전쟁의 발발, 홀의사의 사망과 그 부인의 미국 귀국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홀 의사의 유산으로 평양에 그를 기념하여 병원이 설립되었다. 다글라스 폴웰 의사가 이 새 병원에서 1897년 2월에 개원하였다.74)


로제타 홀은 다시 돌아와 1898년 6월 18일 여성진료소의 문을 열었다. 평양감사의 아내의 병을 낫게 해준 결과, 치료소 이름을 감사하게 지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 감사는 광혜여원(Women's Dispenary of Exten-ded Grace)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75)

 

그 당시 신문에 "평양에 잇는 병원"이란 제하로 "홀의원의 부인이 처음으로 병원을 륙월 십오일부터 열고 병인들을 곳쳐 주엇ㄴ디 ㅎ달반 동안에 병인 소빅여 명을 보앗더라"76)라는 기사로 보아 이 여성병원은 여성들의 치료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양의술의 보급은 물론 그 당시 내외법은 타파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홀의사의 보고에 의하면, "나는 아침 외래 환자를 진찰할 때에 가마를 타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많이 본다. 병세가 중태가 아니었다면 도무지 못을 길을 왔다고 말하면서 내가 매우 용한 의사란 말을 듣고 왔다고 하였다"77)적혀 있다.


한국에 의녀의 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의녀의 제도는 태종 6년(서기 1409년)에 창설되었는데 그때부터 주로 부인들의 질병의 진료와 침구슬을 병행하였다. 이 의녀들은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을 금지해 온 당시의 풍습 때문에,외부의 남성들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천류의 노비출신으로 충당되었다.
의녀들의 출신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연산조에 이르러서는 의녀들을 기녀들과 함께 공사의 연회에 참가하게 하였고 비록 중종 때에 이르러 이를 금하기는 하였지만 좀처럼 시정되지 않아 의녀들은 부인들의 진료 및 침구슬 외에 약방 기생이라는 이름으로 기녀들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였다. 비록 의녀들이 머리에 흑단으로 만든 "족도리"를 써서 다른 관기들보다는 품위가 높은 것을 표시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천시되어 왔으므로,갑신정변이 일어난 뒤노비제도는 폐지되고 서양의법에 의한 왕립병원을 설립하여 현대식 간호원을 모집하려 하였을 때 이러한 전통 때문에 지원자가 별로 없었다.78)

 

이와같이 내외법이 뿌리깊은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여의사, 간호원,여자병원 조력자들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으며,이들을 양성해낼 수 있는 훈련기관,교육기관이 필요했지만 응하는 여성들이 별로 없었다. 예를 들어 1915년 홀의사가 한국의 선교 여의사로 활동한 지25주년이 되는 그해 한국에는 여성을 위한 의학전문학교가 없었는데 비해 중국에는 이미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세계의 여자의학 전문학교가 있었고 인도에는 아그라(Agra)에 70명의 의학도를 가진 여자의학 전문학교가 있었다.79)

 

이러한 가운데 우리나라의 최초의 여의사인 박 에스더가 탄생하였다. 그녀는 로제타 홀이 서울 이화학당에서 생리학과 약물학 강의를 맡아했을 때 뽑힌 학생이었다. 그녀는 시료소에서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원래는 수술보조를 싫어했으나 홀 부인의 언청이 수술을 본 다음부터 마음이 달라져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또한 그녀는 세례를 받아 에스터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그녀의 원래 이름은 김점동이었다.

 

에스더는 홀 부인이 1849년 11월 29일,홀 의사의 추도식을 지낸 뒤 미국에 돌아갈 때 데리고 가달라고 간청하여 드디어는 1896년 10월1일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1900년에 그녀는 미국에서 의학 석사를 받아 귀국했고 그녀의 남편은 에스더가 의학교를 다니는 동안 볼티모어 식당에서 열심히 일해 아내를 도왔다. 그러다가 폐결핵에 걸려서 에스더가 졸업반 때 병사했다.

그녀는 귀국 후 "어머니의 의료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어머니와 함께 일한 지10개월 동안에 그녀는 3천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했다"라고 셔우드 홀은 기록하고 있다.80)

 

정규 의료학교가 설립되기 이전에 조선 여성들은 주로 병원의 조력자(helper)들로서 일했는데, 약국,부엌,세탁장들에서 의사의 감독하에서 일을 했다. 그들은 동시에 성서를 환자들에게 읽어주고 가르쳐 주는 역할도 했다.

간호원들을 위한 훈련학교가 W.F.M.S의 후원하에 1903년 3월에 서울의 부녀자와 아동을 위한 병원(Woman's and Children's Hospital)과 제휴하여 시작되었다. 1902년에 에드문즈(Margaret J.Edmunds)양이 이 일을 위임받아 1903년 3월에 서울에 도착한 것이다.

 

훈련학교가 시작되었을 때 이전에 병원에서 일하던 여성들 중 몇몇이 입학을 지원했다. "그들 중 한 명인 마르다(martha)는 몇 년 전 병원에 왔는데, 그녀의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이 없었고 코의 일부가 없었다. 이는 그녀의 남편의 짓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왔을 때 인상이 별로 좋지 않고 무지하고 냉담한 여인이었지만,그리스도의 복음의 부드럽게 하는 영향력이 작용을 했고 이 어두운 땅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는 여인이 되었다.또 다른 하나는 환자로서 병원에 온 그레이스(Grace)인데 그녀는 절름발이였다. 이 여인은 노예생활로부터 구원을 받고 많은 결함들을 고친 후에 병원관리자로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81)

 

이렇게 해서 한국 여성들의 의료교육이 시작되었다. 1927년까지는 의사 20명,약사5명,그리고 치과의사 2명이 탄생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일본에 6명,중국에 2명,미국에 3명이 의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원과정을 하고 있었다.82) 의료기관의 존재는 물론 전도사업을 도와주기도 하였다.여선교사들이 전도하러 다니면서 만나는 수많은 병든 여인들을 병원과 연결해서 치료해주고 그녀들을 믿게 할 수 있는 통로가 된 것이다.

"종종 우리가 마을을 통과할 때,우리는 병원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인도된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하루는 한 여인이 웃음을 띠우며 나에게 인사를 하면서 '작년 병원에 있으면서 믿기를 배운 이래 교회에 다니고 있다'"83)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따라서 그의 생각들이 이 삶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보다 더 복음을 잘 제시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84) "온리(On Lee)는 서울의 부녀병원(Woman's Hospital)에 있는 환자인데,그녀는 그리스도의 힘이 드러나는 그녀의 약함을 찬양한다. 그녀는 나의 몸에 결함이 없었더라면 내 영혼을 키울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85)

 

1906년 로제타 홀의 광혜여원에 대한 보고에 의하면 "지난 2년동안에 많은 수가 세례를 받았거나 교회의 충실한 신도가 되었다"86)고 한다. 병원에는 흔히 전도부인이 있어서 환자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퇴원한 후에도 믿음을 계속 가지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평양의 연합 기독교병원과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같은 전도방법으로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즉 세브란스 병원의 경우, 남녀 각기 1명으로 구성된 전도사팀이 두 조가 있어서 서로 교대로 병원과 병원 밖에서 전도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들 전도사팀은 한달 동안 병실과 외래환자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다음 한 달은 기독교에 관심을 표시한 퇴원한 환자의 집을 방문하여 전도를 했다. 이와같은 전도방법은 다분히 다양성을 지닌 효율적인 방법인 동시에 퇴원한 환자를 그 고을의 목사나 전도사에게 인계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애비슨(Dr.Avison)의 보고에 의하면 이와같은 전도방법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잠시 동안이었다고 한다. 즉 세브란스 병원의 전도사업이 기대하였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원인을 두가지로 보았다. 첫째, 퇴원한 환자들이 병원에서 소개받은 교회나 교회지도자들을 소개장을 가지고 직접 찾아가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고 한다. 둘째 원인은 교회지도자들 가운데 병원에서 소개받은 환자의 이름과 주소를 가지고 그들을 직접 찾아가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한편 병원의 전도사들은 ㅎ퇴원한 환자의 집을 방문할 때 병원에서 먼 거리에서 사는 사람보다 오히려 병원에서 채택한 전도방법은 이론상 좋은 것 같았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이와 같은 전도방법을 포기하는 방법이 속출하게 되었던 것이다.87) 그런데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자처하는 의료사업은 필연적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재래식 의술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 재래식 의술은 주로 미신이라고 비난받았다.

 

"한 마을에서 한 마술사가 우리가 머물고 있는 다음 집에서 외우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단조로운 멜로디를 듣고 그녀가 무얼 하고 있는지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앞에다가 작은 탁자를 놓고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탁자 위에는 쌀과 돈이 있었는데, 그 집의 여인의 병을 낳게 해 준다고 생각되는 주문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가 그녀는 주문을 멈추고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시오,당신들이 여기 있으면 일을 하 ㄹ수가 없오.'우리는 말하기를 '당신은 그런 식으로는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소.'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예수에 관해 말하려 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는 그분이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소.언젠가 나도 그분을 믿을 것이오.그러나 지금은 안돼요!' 88)라고 말했다.

 

병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재래식 치료법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미신이라고 몰아붙이지 말고,조선 민중들의 심리를 좌우하는 종교, 문화 전통으로 존중하고,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았어야 했다.

 

고종 13년 일본과의 소위 "수호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서양의학이 수입되고 서양 선교사를 통하여 洋의학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1905년 세브란스 의전의 설립과 함께 의학교육과 신의 사상이 보급됨으로써 병 치료의 바법이 무의에 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각이 있었다.89) 또 한편 일제는 무속신앙의 구축을 현대화를 위한 것보다는 동화를 노려, 민족 전래의 원시 종교를 미신 타파라는 표면적 구실로 무격과 점복사에게 은근한 탄압을 가하였다. 특히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군중이 모이는 것을 싫어한 일제는 산제,기우제,별신제,장전,석전,차전 같은 민족 전래의 신사에 대하여 위생 또는 치안을 이유로 집회를 불허하거나 강제로 해산시켰다.90) 따라서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을 타고 생활의 근대화를 목표로 하던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은 거침없이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양의학의 보급은 결국 한방과 침술 등의 재래식 치료법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퇴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