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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초기의 교회여성 - 1.전도부인(교육과정)

Joyfule 2007. 1. 27. 00:40

1.전도부인

2) 교육과정

그러나 전도부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전달했느냐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는 선교사들이 그들의 부족한 언어 능력으로 이들을 얼마나 훈련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도 결부된다. 1895년 10월 한국선교 10주년 기념선교협의회에서 아펜셀러 여사는 "당신들이 단지 2-3개월의 훈련을 받은 다듬어지지 않은 이교도(a raw heathen)와 같이 다니면서 그녀가 말하는 대로 내버려둔다면 그가 예수를 전하는지 부처를 전하는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참으로 의심스러운 선교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15) 라고 하였다. 따라서 전도부인들 및 교회의 지도자들을 교육시킬 필요성이 생겨났다. 슐스(Scholes)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설교하는 기술은 신중함과 훈련이 요구되는 일이다. 우리 전도부인들 중의 하나는 너무나 열심이어서 방문한 집 여자와 어느 정도 친해지면,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는 정도로는 결코 만족해 하지 않는다. 안주인이 설교보다는 외국인이라는 것에 더 호기심과 관심을 표시하면,그 전도부인은 모든 질문들을 너무나 간략하게 대립해 버리고는 곧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대부분의 경우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전도부인이나 다른 기독교 여성들과 함께 심방을 하는 경우, 우리는 종종 일상사에 대한 친절한 말과 관심을 표시하면 얼마나 사람들이 감동하고, 그 느낌은 곧 사랑과 죄, 등, 영적인 메시지에 쉽게 반응하는가를 볼 수 있다. 이런 연구와 훈련의 특별코스를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곳이 성서학원(Bible institute)이다."

 

또 자기가 알고 있는 부산진의 성서학원을 소개한다.

"정규코스는 매해 두달씩 5년 동안 한다. 강의안은 구약성서 중 몇권,복음서,그리고 서한들 중 몇권을 포함한다. 또 이 성서학원에서는 매주 교육학에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할애되는데 가능한 한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동료학생들 앞에서 차례로 실습을 한다. 이것은 정규반(Ordinary Class)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훨씬 힘든 일이지만,자신감을 심어주기도 하고, 반대로 지나치게 자기를 과신하는 학생들에게 그녀의 잘못들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이 학기 동안에 우리는 이러한 비판학습을 위한 주제로서 십계명을 택하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앞으로 자기들이 십계명을 가르칠 때는 과거와는 아주 다르게 가르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16)

 

장로교의 경우 1897년 처음으로 단기성경학원을 시작한 것이 그 효시로,훈련기간은 6개월이었다고 한다. 1907년 처음으로 여교역자 훈련원을 시작하여 106명이 참석하였고, 1910년에는 정식으로 여자성경학원이 되어 보다 계획적인 교육을 하게 되었다.

1908년 가을 평양에서는 남북 감리교,선교부가 합동하여 여교역자 양성을 위한 단기 강습회는 개최하고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8개월의 훈련을 실시하였다. 1주에 4일은 공부를 하고 나머지는 각 교회로 나가 성경반을 인도하여 전도실습을 하였는데 이때에 참여한 수는 82명이나 되었고 이들을 위한 기숙사까지 마련하게 되었다. 한국식 집을 지어 기숙사로 쓰게 하고 흙담과 온돌을 깨끗이 청소하고 음식을 위생적으로 처리하도록 가르쳤다.17)

 

감리교의 경우에도 1906년 원산에 보혜여자성경학원(Alice Cobb Woman's Bible School)을 비롯하여 개성(1909),춘천(1918),평양(1915)등 지방 도시와 만주(1937)에까지 설립되었다.

원산 보혜여자관은 남감리회 최초의 여자성경학원의 산실이었다고 한다. 메리 놀스(Miss Mary Knowles,1901) 여선교사가 1906년 원산 남촌 예배당 옆 초가집에서 부인들을 모아놓고 성경과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1907년 남감리회 여선교부 총무 앨리스 콥(Alice Cobb) 여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원산을 둘러보고 여성 교역자 양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귀국하여 많은 기부금을 모아 원산에 여자성경학원을 설립한 것이다.18)

 

그러나 여자성경학원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된 것은 서울 감리회 여학당이다. 1905년 6월 스크랜톤은 지금까지 사경회 때에 여전도인 양성반을 상설 교육기관으로 확대시켜 닐리 밀러 여사(Mrs.Nellie Miller)와 스크랜톤 여사 등을 미감리회 여학당에 파송하였다. 1905년 감리회 여학당으로 시작할 때 여섯 개의 방을 얻어 셋은 교실로 셋은 기숙사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1907년 6월 15일 첫 졸업생 4명을 배출하였다.19)

 

이는 후에 한국 서울 부인성서학원(Woman's Bible School,Seoul,Korea)으로 개명되었는데 이때 본과와 예비과로 나누어 예비과는 보통학과를 공부치 못한 젊은 여자에게 성경을 배우기 전에 심지를 훈련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본과는 3년으로 성경 전부와 교회사기(史記)와 도덕학,기타 창가,체조,가정교육도 포함해서 가르쳤다.20) 이런 식의 전도부인 훈련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초기의 전도부인들,그리고 현재 지역에서 일하는 충실한 일꾼들의 대부분은 선교 성서 학원(Mission Bible institute)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가장 충실하고 성공적인 우리의 일꾼들 중 대다수가 별로 폭넓은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믿는 그분을 알며'그분을 다른 살마들도알게 하려는 정열로 가득차 있다."21)

 1918년부터 1923년까지 있었던 성경학원의 수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18     1919   1920   1921   1922    1923
 성경학원 수             31       29     30     29     31      30
 등록한 학생 수       1,614    1,281  1,154  2,128  2,412   2,576
 교사들 수              110      126    114    117    171  *189 22)
 (*:세 선교부가 보고했는데 그중 두 선교부만이 교사 수를 보고했다.)
이 성경학원이나 성경학교에는 주로 참석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이 있는 주일학교 교사들, 전도부인들, 신학생들이 다녔다. 이때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쌀을 대신 받기도 하였다.23) 이러한 훈련을 받은 여성들에게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의 보고서에서 볼 수 있다.

"이 닐 성경학원(Neel Bible School)학생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주일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고 모임들을 지도하고 자원 봉사들을 (Auxilia- ries)관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전도부인들보다는 낫게 가르칠 수 있는 법을 아는 여성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의 결핍을 마을로부터 닐 성경학원에 찾아오는 젊은 여성들을 꾸준히 훈련시킴으로써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24)

 

또 선교사의 서신을 통해서 보면 닐 성경학교의 졸업생들에 관해 이렇게 써 있다.

"우리 졸업생들 중의 하나인 이정희는 원래 평양 출신인데, 과부가 되자 남쪽으로 내려와 옷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녀는 그녀가 살고 있는 교회에 대단히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 교회는 그녀를 도와 이곳 학교에 보냈고, 이제 3월이 되면 졸업하고 돌아가서 그 교회의 전도부인이 될 것이다. 그 교회는 패스레(Paisley)선교사의 지역이며 고향에 있다. 또다른 소녀인 김매실은 지금 24세인데 6년 전에 과부가 되었으며, 그도 이번에 졸업한다. 우리는 그녀를 기숙사 일을 돕도록 할 예정인데, 기숙사 사감은 그녀가 훌륭한 살림꾼이며 물건을 구입하고, 기숙사로 오가는 편지들을 잘 처리할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음악에도 능하며, 글도 잘 쓰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나의 사무실 일도 도울 수 있을 것이다."25)

 

성경학교 중의 하나인 아다 해밀톤 크락 기념학원(Ada Hamilton Clark Menorial)에는 주로 "너무나 가난해서 생활비와 여비를 댈 수 없는 부인드로가 소녀들이 종종 온다. 이들 중 몇 사람은 첩들인데, 기독교인이 되면 집을 떠나므로 갈 곳이 없게 되고, 따라서 학교로 오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도 공부를 계속할 수단이 없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가족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므로 그녀들에게 공부하러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재정적으로도 돕지 않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이 학생들을 돕기 위하여 자조반(self-help department)를 만들었다. Boyer여사가 이 반의 책임자인데,"21명의 여성이 마루에 앉아 일주일에 5일간,매일 2시간,토요일에는 세 시간씩 일을 하여 식탁보,쿠션,손수건 등을 만든다. 그리고 이것들을 팔아야 한다. 이일로 해서 여성들은 시간당 4센트씩은 받는데 12시간을 일하면 최고 약 55센티를 받는다. 그들은 아주 적지만 그들이 공부하는 동안 자기들의 힘으로 학비를 댈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만족해 한다."26)

 

그런데 "이 학교에서 양성받은 사람들이 우리 학교들과 교회들을 위하여 진리의 말씀을 훌륭하게 가르치는 교사들이 되고, 더욱더 진실한 기독교 가정을 만들어 그들의 아이들에게 주를 위해 봉사하도록 훈련시킬 수 있는 많은 지도자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27)

 

이 학교는 기숙사가 차고 넘쳐 모자랄 정도로 발전했는데, 예를 들면 1935년은 57명이 등록했고, 3월 14일에,저급반(lower department)의 학생들과 고급반(higher department)의 학생들이 졸업한다. 특히 고급반 학생들의 졸업은 이때가 처음이며 "이 훌륭한 젊은 여성들은 주의 사업에 대단히 필요하리라"28)고 기대한다. 이렇게 성경학원의 수준보다 높은 학교에 대한 요구가 점차로 생겨나게 되었다.

 

고등성경학교(Higher Bible Schools)는 성경학원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장로교 여성고등 성경학교(the Presbyterian Women's Higher Bible School)는 평양에서 1923년 3월 26일에 처음으로 11명의 학생들과 여섯 명의 정규교사들로 첫 학급을 시작했다. 첫 보고서에 따르면 1년에 적어도 7개월의 과정이 있었다. 입학허가는 언급되어 있찌 않지만, 11명의 정규학생들 가운데 6명은 중학교 졸업생들(mission secondary schools for girls)이었고 다섯 명은 성경학원 졸업생들이었다29)고 한다. 여기서는 3년 동안에 과정을 마치도록 되어 있는데 성서의 모든 책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전도적인 경험을 통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강조점이 주어졌고 모든 학생들은 수업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일의 과제가 주어졌다.30)

 

또한 1915년에는 카나다 여선교사 맥클레이 여사가 원산에서 1년에 3개월씩 수업하여 5년에 졸업시키는 성경학원을 시작하여 1930년까지 학원으로 승격시켜 고등학교 졸업자를 입학시키는,본과 3년 반과 국민학교 졸업자를 위한 정과 3년 반으로 나누어 이스케 하다가 1943년에 이 학원도 폐교되었다.31)

 

감리교에서는 1920년 9월에 여자신학교 설립의 필요를 느끼고 남감리교 여선교회와 협동으로 협성여자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협성여자신학교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그 당시의 기사가 있다.

 

"한국에 처음으로 여자신학교가 생겼습니다. 여자신학교라면 좀 이상스럽게 여기는 이도 있는 모양이지만 여자라도 종교를 연구하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괴이한 일이 아니겠지요. '여자도 신학공부해서 목사노릇 하나?' 하지만 신학은 의례히 목사공부로만 생각한다면 오해이지요,그리고 여자가 목사 노릇할 때도 멀지 아니하여 올 줄로 압니다. 한국에 예수교가 드러온 후에 남자를 위하여는 종교의 진리를 연구하는 교유기관을 만들고 그 기회를 주었지만 여자를 위하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여자들도 교육정도가 높아감에 따라 실력있는 여자전도인도 있어야 하겠고,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종교를 연구하고저 하는 이의 요구에도 응하리라는 목적으로 새로 나타난 것이 서울의 협성여자신학교외다. 성경 이외에 철학,논리학,심리학 및 사회학 등도 교학한답니다. 전영택씨도 그 교수 중의 한분이외다. 지원하시는 이는 속히 본 신학교로 교섭하십시오."32)

 

1920년 이후, 협성여자신학교로 발전하면서 처음에는 갑과에 여자고등보통학교(중등 4년제)졸업 정도로, 을과는 보통학교(국민학교)졸업 정도로 18세 이상 되는 여자를 모집하여 성경 이외에 중등학교 정도의 일반 학과를 가르쳐 우리 교회의 지도적 인물을 양성하였다. 1924년 3월 28일에는 협성여자신학교 제1회 갑과 졸업생으로 리효덕,유신덕,김현심,김고라 등 4명을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로 배출하였다.33)

 

이 협성여자신학교는 1931년 3월 제7회 21명의 마지막 졸업생을 내고 1932년 4월부터 협성신학교와 병합되고 채핀 여사(Mrs,A.B.Chappin)는 부교장이 되었다.34) 협성신학교의 학제는 20년간 3년제였다가 1922년 4월 신교육령에 의해 중등교육도 1년간 연장(남5,여4년제)되었는데 이는 사회적 변화 때문에 취해진 조처였다. 이리하여 1929년 처음 모집된 4년제 신입생을 남녀공학의 첫 사례였다.35)

 

이 남녀공학제는 1912년에 성결교회의 성서학원에서도 이미 실시하였으나 페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때는 남녀공학제가 되어 남녀학생이 한 강당에서 배호게되니 교실,교수및 경제 문뎨에는 유익되는 방면이 업지 아니하나, 남녀 지식 뎡도의 차이가 현수하야 곤난한 뎜이 만핫고 또는 조선의 자녀들이 구 가뎡교육을 밧은 외에는 다른 교육이 업습으로 살님사리하는 여가에라도 교역을 보좌케 할 목뎍으로 부부공학의 제도도 씻스니 이 제도가 어느 뎡도까지는 리샹뎍이라 할 수 잇스나 그와 반대로 정신상으로나 실제상으로 자타에게 밋치는 악영향도 적지 아니함으로 남녀공학,부부공학의 제도를 폐지하니라."36)

 

즉 배가례에 의하면 그 당시 전도부인들은 대체로 과부,버림받은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대체로 남성들에 비해 지적 수준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녀공학을 페지하였다고 한다.37)

그러나 협성신학교의 남녀공학제는 "15인의 남학생과 5인의 여학생으로 1학기를 공학케 하였는데 생각하던 바와는 매우 좋은 성적으로 지냈습니다."38)

라는 보고를 할 수 있을 만큼 좋은 편이었다. 그리하여 1933년 3월의 졸업식에는 입학할때 남자 15명 중 4년 동안에 8명이 탈락되었고 여자는 오히려 2명이 타교에서 편입되어, 4년간 소정의 남녀공학의 신학교육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협성여자신학교가 별도로 존립할 이유가 없어 1931년 7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폐교되었다.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