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은 중공업 기초를 닦았다 |
박정희대통령 시절 초대 중공업차관보로 재직하며 포항재철 건설, 4대 핵공장 건설, 자동차산업 육성 프로그램을 입안한 우리나라 중공업 발전의 주역 김재관 전 인천대 대학원장의 증언을 통해 이승만대통령의 철강산업 건설에 대한 비화를 소개한다.
건국 후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아 6.25동란이 발발하자 일제 36간년의 수탈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우리나라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1950년을 연것은 동족상잔이었고 무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전쟁을 치뤄야 했던 우리나라는 부존자원도 없고 변변한 산업시절도 없었다. 그나마 있던 산업시설마저 6.25동란으로 온전한게 없는 상태에서 1950년대 국방비가 전체 정부예산의 50%, 문교예산이 20%를 차지했다. 그 어려운 시기에도 국방비를 제외하면 문교예산 비중이 가장 컸다는 사실은 그만큼 교육을 중시했다는 말이다.
이 무렵 미국의 對韓 원조는 우리의 생명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시행된 미국의 원조는 주로 구호적인 성격의 자금이었으나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대충자금(對充資金,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의 원조 물자를 받은 나라의 정부가 이것을 공정 환율에 의해 국내에 팔아 얻은 국내 화폐 자금)을 설치하여 일부는 유엔군의 전비와 정부예산으로 충당하기 위해 세입으로 편입하고 일부는 산업자금에 방출되어 그 자금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 수준은 흔한 똑닥단추도 만들만한 형편이 못됐는데 이 산업자금은 신진자동차 같은 기계공업을 지원 하는 등 이 자금이 각 분야에 지원되어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의 불씨가 됐다. 또한 미국의 원조 중에 '기술원조'라는 항목이 있어 그 기술원조자금으로 인재육성에 힘썼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승만 정부의 문교예산 비중을 보더라도 얼마나 인재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나를 알 수 있다.
이제 김재관씨의 증언으로 돌아가 보자. 김재관씨는 "이승만대통령은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분이다. 그가 산업 문명의 핵심이 철강공업에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미국에 오랜 기간 살면서 최고급 교육을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라고 증언했다. 그만큼 교육의 힘은 지대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승만대통령은 인재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6.25의 휴전 문제가 흘러나오던 1953년 부산 임시정부는 전후 복구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李대통령은 1953년 4월 4일 '전쟁이 끝나면 하루 빨리 부흥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니, 그 기초가 되는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 특히 주택건설사업을 위한 함석.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할 제강사업 건설계획을 우선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통령령으로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현 인천제철)를 국영기업으로 설립하고 年産 5만t 규모의 평로(平爐)를 건설키로 하고 미국 원조기관에 철강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지금 수백만의 피난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무슨 철강공장 건설인가, 민생문제부터 해결하자'며 거절했다는 보고를 받은 李대통령은 '못이나 양철판이라도 있어야 판잣집이라도 지을 것이 아닌가'라며 '미국이 돈을 못 낸다면 우리 정부가 보유한 자체 보유불($)로 공장을 지어라'고 지시했다. 극심한 달러 부족으로 장관이 외국 방문을 갈 때도 손수 달러를 세어주었던 李대통령이 철강공장 건설을 위해 1백 40만 달러라는 거액을 투자키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는 李대통령은 직접 부산에 와있던 서독적십자 병원의 후버박사에게 '우리가 철강공장을 지으려는데 서독이 기술지원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서독은 1954년 실시된 국제입찰에서 서독 최대의 제철시설 제조회사인 데마그사가 미국과 스위스 회사를 제치고 사업권을 따냈으며 1956년 3백 80만 달러짜리 압연공장 건설사업도 수주했다.
李대통령은 그 어려운 시기에 외국 차관 한푼 안 들이고 순수한 우리 자본으로 제강공장을 건설했으니 이는 2차대전 종전 후 후진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중공업 프로젝트로서, 그는 미국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단을 내릴 정도로 국가 근대화에 대한 통찰력과 탁견을 가졌던 분이다. 공장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기술자와 관리자들이 서독에 가서 현대식 철강산업을 배우고 돌아와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기초를 닦았고 이때 양성된 인력들이 포항제철 건설에 대거 참여하여 후일에 '포철 신화'를 이룬 것이다. 李대통령의 혜안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더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 '포철 신화'를 目睹했을지도 모르고 더 나아가서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크기만큼의 번영을 누리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산업 근대화의 토대를 닦은 분은 이대통령이었고 그 토대 위에서 신화를 이룩한 분은 박대통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훌륭한 두 분 대통령을 맞이한 행운으로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해 무심하고 무지하기까지 했으니 자라는 세대들 역시 건국 대통령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고 친북좌익세력들의 세뇌교육에 함몰되어 이승만은 타도대상이며 독재정권의 괴수쯤으로 여기니 오늘날 친북좌익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치욕적인 망언을 듣는 것은 자업자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나라 중공업 발전의 산역사인 김재관씨는 "나는 李대통령이야말로 우리나라 중공업의 기초를 닦은 분이라고 평가한다"고 증언했다. 그러니 李대통령이 산업 근대화 토대를 닦았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자는 친북좌익세력들을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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