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한복 - 노영순
생각이 한 갈래로만 흘러 좀처럼 폭넓게 이어지지 않을 때 좁은 아파트는 때로 창살 없는 감옥으로 옥죄여 온다.
진종일 사유의 강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흙내음 가득히 풍기는 숲이나 들로 나가면 가슴 가득 활력이 차 올라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어 즐기는 편이다.
모처럼 나선 드라이브였다. 시골길을 달리는데 맞은편에서 요령 소리를 울리며 상여가 다가왔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보기 드문 꽃상여에 죽은 이의 아픔도 접어둔 채 아이들처럼 한눈을 팔았다. 얼마가지 않아 같은 방향으로 가던 또 다른 상여를 만났다 .
아마도 위아래 동네에 같은 날 초상이 났던가 보다. 하얀 종이꽃이 주렁주렁 달린 상여 뒤로 굵은 베옷에 두건을 두른 유족들이 따르고 있었다. 상복에 맨 머리 차림의 아이들도 서너 낀 행렬의 꼬리에서 검은 한복을 입은 한 여인을 보았다. 누런 베옷 속에서 검은 빛깔은 단연 돋보였다. 차가 상여를 스쳐 지날 때 바라보니 여인은 전혀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언뜻 몸 전체로 슬퍼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데도 탈진해 겨우 몸을 가눈 다른 이보다 몇 갑절 더 슬퍼 보였다.
망자와 무슨 관계인지 여인의 정체가 수수께기 같았다. 상여를 만난 것 빼곤 시골길은 단조롭고 한산했다. 그런 아늑함 속에서 편안한 사색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여인이 입었던 한복이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며 미진한 기억의 자락을 자꾸만 헤집어 흔드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검은 한복을 입은 여인을 만났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낮에 본 여인이 아니라 30년도 훨씬 전에 우리 집에 와서 눈물로 밥을 말아먹고 떠났던 여인을 보았다.
친구들과 놀다 돌아 와 보니 낯선 여인이 대청마루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처음 본 검은 한복과 파르르 떨리던 긴 속눈썹이 참 아름다웠다. 향긋한 지분 냄새를 풍기며 손수건을 쥐어짜던 여인은 엄마에게 무언가 굳은 맹세를 하고 또 하며 대문을 나섰다.
긴 머리채를 맵시 있게 틀어 올린 여인의 뒷모습에서 가냘픈 어깨와 목이 무척이나 희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날 여인이 외삼촌과 더불어 남해의 작은 섬으로 떠난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들의 흔적을 찾다가 쉽게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지 외숙모네는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왔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엔 철부지 사촌들과 얼크러져 놀던 추억이 많다. 어머니는 외숙모를 볼때마다 "그년이 눈물로 밥을 말아먹는 연극에 내가 깜박 속고 말았네" 하며 미안해했다.
실제로 여인은 쉴새 없이 밥그릇 속으로 눈물을 쏟으며 수저를 움직였다. 저렇게 울면서 어떻게 밥을 먹나 싶을 정도였으나 남긴 것이 없었다. 왜 눈물로 밥을 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어릴 적의 일인데도 그 여인에 대한 기억만은 뚜렷이 남아 이따금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만큼 여인은 내게 색다른 세계였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던 것이다.
여자는 지병이던 폐병으로 땅에 묻히고 갈 곳 없는 외삼촌의 편지가 고향에 닿았을 때는 외사촌들이 쑥쑥 자란 뒤였다. 외숙모의 개가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지 아이들의 소식만을 묻는 편지를 들고 어머니는 며칠이 걸린다는 섬으로 떠날 채비를 하셨다.
모처럼 화색이 돈 외숙모와 함께 우리는 제각각의 비난과 반가움으로 돌아올 외삼촌을 기다렸다. 어른들의 입조심 속에서도 어느새 사건의 추이를 헤아릴 만큼 철이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여인은 삶의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미리 알고 어머니와의 약속을 저버렸던 것은 아니었을지-
사람들의 한숨 속에 섞여 들리던 꼬리 아홉 달린 백여시란 말에 부르르 진저리를 치면서도 마음속엔은연중 여인에 대한 선망과 동경이 자랐던 듯 싶다. 호리한 몸매와 흰 피부가 검은 색에 참으로 잘 어울리던 여인의 사랑과 죽음이 작은 가슴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분위기에 반해 나도 언젠가는 그런 옷을 꼭 입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함부로 입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자라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사람에겐 누구나 좋아하는 색과 어떤 특정한 색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 그중 검은 색은 참으로 화려한 반면 어둡고 칙칙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어 죽음과도 연관지어진 색이다.
어머니의 회상을 빌리면 여인의 짧은 삶과 용납될 수 없었던 사랑은 모두 청승맞게 즐겨 입었던 검은 한복으로부터 기인된 것이었다.
심오하고 차가운 피카소의 청색처럼 검은 색은 한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여지껏알 수 없는 힘으로 지배해 왔다. 내게 있어 검은 한복은 숨겨진 눈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다. 어려서 각인된 기억의 편린은 좀처럼 형태가 바뀌지 않는 것인지 지금도 눈물과 사랑의 도피가 연상되어진다. 우물안 개구리의 구태를 벗지 못하고 선과 악이 확연히 구분되어지지 않던 시절의 아련한 애수 같기도 하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검은색이 주는 비극적인 면만 부각되어 내 마음 깊숙이 주홍글씨의 의미로 자리 잡았나 보다.
어쩌면 함부로 펼쳐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누구나의 마음속에 숨겨진 은밀한 유혹은 아닐까.
차마 용기는 없었지만 아직도 검은 한복에 끌리는 묘한 매력과 향수를 버리지 못한 체 뭔가 견디기 어려운 마음이 나를 휘감으면 맨 밥에 물을 말아 반찬도 없이 먹는다.
밥을 만 물이 내 눈물이거니 생각하면서, 때로는 그 옷을 떨쳐입고 길을 나서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이제껏 검은 한복을 마음에 두르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때의 여인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었다. 그토록 알 수 없었던 눈물로 밥을 말아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조금은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이 되어 나를 옥죄어 왔을 검은 한복을 그만 벗어버리고 좀더 자유롭게 살아야겠다. 검은 한복일랑 먼 내 유년의 동경 속에 묻어 둔 옷자락으로 남겨두고 싶다.
수필가.전남함평출생. 한국수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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