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羅牛) 특별전에서 - 이순영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의 해를 맞이하여 연 작은 전시장이다. 송아지와 어미 소가 넓은 초원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영상 위로 시냇물 같은 음악이 흐른다.
화가 이중섭의 그림 ‘소’로 마무리가 되는 영상과 깊은 산 맑은 시냇물 같은 음악은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무대 중앙에는 천삼백 여 년 전의 무덤에서 출토 된 토용(土俑)인 소와 여인상이 서 있다. 유리 상자 속에서 관람객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소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떨거렁 떨거렁 워낭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두어 발자국 뒤에 바소쿠리에 수북하게 담은 풀을 지게에 진 귀동 오빠가 걸어올 것만 같다. 소의 해에 태어난 옆집 오빠. 그는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으로 달려와 지게를 지고 소를 앞세우고 ‘안새알마을’(사람들이 부르는 골짜기 이름)로 갔다 오곤 했다.
나는 그곳에 무척 가보고 싶었다.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소 먹이러 가는 길’에 따라 나섰다. 마냥 신이 났다. 송아지와 어미 소들과 함께 줄을 지어 동네 어귀를 돌아 냇물을 건너고 언덕을 올라 휘어진 산모롱이를 돌았다.
비탈진 밭에서 자주색 감자도 캐어 망태기에 담았다. 나는 처음 보는 일이라 주인에게 들켜 혼이 날까 봐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지만 속내를 감추며 그들을 따라 호주머니에 감자를 주워 담았다. 호주머니는 금세 불룩해졌다. 작은 소떼 행렬은 다시 좁은 길을 걸어 조금 널찍한 곳에 이르렀다.
그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이까리’(소의 몰에 묶어 두는 긴 줄)를 소의 뿔에 감아 단단히 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줄이 나뭇가지에 걸릴 경우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소를 산 위로 ‘훌쳐’ 보냈다. 소들이 스스로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며 싱싱한 풀잎을 뜯어 먹는 사이, 우리들은 주위에 있는 돌과 나뭇가지들을 주어다가 적당하게 무더기를 만든 다음 불을 지폈다.
불꽃이 사위어들면 감자를 불에 달구어진 돌멩이와 알불이 있는 무더기 속에 넣어 두고 오빠들은 ‘소꼴’을 하거나 나무를 하러 가고, 언니들은 물놀이를 하러 갔다. 나는 따라 다니고 싶었으나 감자를 지키라기에 갈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감자밭 주인이 쫓아와서 호통을 칠 것 만 같고, 오빠와 언니들이 산 속에 나만 홀로 남겨두고 어디로 가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멀리 가지 않고 내가 보이는 곳에서 꼴을 베는 귀동 오빠가 고맙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산에 해가 한 발쯤 남아있을 무렵, 지게에 땔감이나 꼴을 진 오빠들과 물놀이 간 언니들이 돌아왔다. 기다란 나뭇가지로 껍질 채 불속에 넣어 두었던 감자를 꺼냈다. 설익은 감자를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버릴 만큼의 용기도 없었다.
껍질이 검게 탄 감자를 손에 들고 어쩌지도 못하는 나에게 말랑하게 잘 익은 작은 감자를 껍질 벗겨 손에 쥐어 준 것도 귀동 오빠였다. 그렇게 감자서리를 하는 동안 산으로 풀을 뜯어 먹으러 갔던 소들이 불룩한 배로 산에서 내려왔다. 오빠들은 지게를 지고 뿔에 묶어 두었던 줄을 풀어 손에 잡고 온 길을 되돌아 집으로 왔다.
무쇠 솥에서 구수한 쇠죽냄새가 피어날 때쯤이면 나는 아궁이 앞으로 가곤했다. 그곳에서는 주전부리들을 가끔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궁이 채 찐 풋콩이나 잘 구운 감자나 고구마를 얻어먹는 재미는 눈깔사탕보다 훨씬 달콤했다.
어떤 때는 기대에 들떠 달려가면 외양간에서 소가 큰 머리를 쑥 내미는 바람에 놀라서 소리를 지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마당가에 세워둔 긴 빗자루를 들고 소를 위협하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나는 소가 무서웠다. 소 앞에 있으면 뿔로 떠받을 것 같고, 뒤에 있으면 꼬리로 치거나 뒷발질에 채일까 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더욱 더 무서움을 느끼게 하여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게 할 때도 있었다.
내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즈음, 오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도 잘 하지 않았다. 배를 잡고 뒹굴며 눈물이 나도록 웃게 하던, 때로는 귀신이야기로 공포감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게 하던 모습은 점점 보기 힘들어졌다. 지게를 지고 소를 몰아 들녘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듯했다. 작두질도 더욱 능숙하게 했다.
수년 전, 하늘 집으로 갔다는 고향소식을 들었다. 가슴 한 쪽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던, 그 창백해지던 순간의 기억이 오늘 ‘신라의 소’ 특별전에서 되살아난다. 떨거렁 떨거렁 ‘요롱’(소의 목에 달아둔 ‘요령’의 방언) 소리와 함께 사립문은 밀며 뚜벅뚜벅 걸어오던 귀동 오빠가 그립다. 보고 싶다.
▽ 이순영 프로필
경북 포항 출생
계간 문학세상 수필부문 신인상(등단)
동서커피문학상 수필부문 수상
보리수필문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 회원
포항문예아카데미회원
글 항아리 독서회 회원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원의 가을 - 윤오영 (0) | 2012.07.20 |
---|---|
겨울 연가 - 도월화 (0) | 2012.07.19 |
고모의 정 - 정영숙 (0) | 2012.07.17 |
서울! 어느 하늘 아래 있을까? - 이현실 (0) | 2012.07.16 |
꽃 시장 가는 길 - 이정아 (0) | 2012.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