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이한규목사

관리에 탁월하십시오

Joyfule 2015. 5. 20. 08:25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28) 자기 관리에 탁월하십시오 (열왕기하 12장 1-16절)

< 요아스의 성전수리를 위한 개혁 >

 7세의 어린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남 유다의 8대 왕이 된 때가 북 이스라엘 10대 왕인 예후 제 칠년이었습니다(1절).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지만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 제사를 행했습니다(2-3절). 산당 제사가 비록 여호와를 숭배하는 제사였어도 산당 제사는 무속적이고 혼합적이고 이단적인 요소가 많았기에 없애야 했습니다.

 어느 날, 요아스 왕이 제사장들에게 성전 수리를 명하며 3종류의 헌금을 거두게 했습니다(4-5절). 첫째,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었습니다. 그 헌금은 20세 이상의 장정에게 부과된 주민세 혹은 인두세였습니다. 둘째,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었습니다. 그 헌금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서원한 자들에게 제사장의 평가에 따라 받은 헌금으로서 연령이나 성별에 따라 액수가 달랐습니다. 셋째, ‘자원해 성전에 드리는 은’이었습니다. 그 헌금은 자원해서 성소에 바치는 은을 말합니다.

 그 헌금으로 성전을 수리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솔로몬 성전은 약 140년 된 건축물이었기에 보수할 곳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무관심하게 방치되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나태한 신앙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 나태한 신앙이 요아스 왕 23년까지 계속되어 제사장들이 성전수리를 외면했습니다(6절). 그 이유는 헌금을 제사장들이 성전수리 외의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생계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수리가 계속 미뤄지자 결국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제사장들이 직접 헌금을 받지 말고 헌금하는 사람들이 성전수리 헌금 명목으로 따로 헌금을 내게 했습니다(7절). 즉 제사장들이 성전수리 헌금도 못 받게 하고 또한 성전수리의 부담도 덜어준 것입니다(8절). 그리고 제사장 대신 따로 세운 재정담당자가 성전수리 헌금을 받고 수리하는 사람에게 직접 헌금을 지출하게 했습니다.

 왕명을 받들어 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가져다가 그것의 뚜껑에 구멍을 뚫어 성전 현관의 오른쪽, 곧 번제단 옆에 두자 성전에 가져오는 모든 은을 그 궤에 넣었습니다(9절). 당시에는 은을 돈 대신 사용했기에 성전수리를 위한 용도로 은을 넣도록 만든 그 궤는 역사상 최초의 헌금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헌금 계수는 왕의 문서와 재정출납을 기록했던 왕의 서기와 제사장들을 대표한 대제사장이 담당했는데 그들은 헌금 궤에 은이 차면 그 은을 자루에 담고 무게를 달아 전체 금액을 계산했습니다(10절). 그리고 그 은을 성전수리를 맡은 총 감독관에게 넘기면 레위인 부 감독관들이 성전을 수리하는 목수와 건축자들과 미장이와 석수에게 주고 또한 성전 수리에 필요한 재목과 다듬은 돌과 기타 물건을 사게 했습니다(11-12절).

 그처럼 요아스 왕이 따로 헌금 궤를 둔 것은 성전수리 헌금과 제사장들의 생계 헌금이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전에는 그런 교통정리가 없었기에 헌금을 성전 수리비용보다 제사장들의 생계비용으로 우선적으로 사용하면서 성전수리가 미뤄진 것입니다. 결국 헌금 궤에 넣은 은은 오직 성전 수리만을 위해 사용했는데 성전 수리가 더 늦춰지지 않도록 그 헌금으로는 각종 성전 기구들도 마련하지 않게 했습니다(13절).

 그 마련된 은을 일꾼에게 성전 수리비로 주면서 출납 담당자들과는 회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성실히 일했기 때문입니다(14-15절). 그 말은 철저히 재정 문제를 담당자에게 믿고 맡겼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재정 담당자는 가장 믿을만한 사람을 세우고 한번 세웠으면 최대한 믿고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재정 담당자는 영적인 리더가 재정에 신경 쓰지 않도록 공동체 운영의 원칙과 영적인 리더의 지침을 잘 받들어 우선순위를 따라 최대한 지혜롭게 재정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 자기 관리에 탁월하십시오 >

 그렇게 성전 궤에서 모금된 은은 성전수리에만 사용했고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제사장의 생계비용으로 썼습니다(16절). 요아스 왕의 1차 성전수리 명령이 잘 이행되지 않은 것은 제사장의 생활 문제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차 성전수리에 나설 때는 그 문제를 보완해서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제사장에게 돌려 제사장들의 생활 문제를 해결하게 했습니다.

 ‘속건제의 은’은 어떤 죄를 지었을 때 피해자에 줄 배상금 외의 성전에 내는 추가배상금을 뜻하고 ‘속죄제의 은’은 원죄를 가진 죄 많은 인생에게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절기 때 의무적으로 드린 헌금 및 스스로 감동이 생길 때나 기도제목이 있을 때 자원해 드리는 헌금을 뜻합니다. 그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제사장에게 돌려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해 쓰게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생계문제는 초월해야지 왜 그런 문제에 집착하나?” 언뜻 들으면 상당히 영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제사장들도 먹고살아야 하기에 제사장들의 생계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은혜롭지 못합니다. 반면에 제사장들이 생계문제에 집착하면 더 은혜가 안 됩니다. 가장 은혜로운 모습은 제사장들이 생계문제 신경을 쓰지 않도록 공동체가 제사장들의 생계문제를 위해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공동체의 평균수준 정도로 챙겨드리는 시스템을 사려 깊게 만들고 시행하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생계문제도 그와 유사하게 처리해서 목회자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80% 이하의 한국 교회가 교인들 평균 정도의 생활비를 목회자에게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여력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때도 “목회자가 굶으면 영성이 깊어져!”라고 하면서 그 문제를 소홀히 하기보다는 그 문제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하루 속히 그 문제가 해결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결국 요아스 왕의 개혁 조치로 재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이 높아지면서 성전수리와 함께 제사장들의 생계문제도 해결되도록 했기에 당시의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들의 조직적인 반발 없이 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즉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의 성전수리 헌금의 수납과 전용을 막아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일부분 빼앗으면서도 다른 제도적인 시스템 보완을 통해 제사장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개혁조치로 성전수리란 오랜 현안을 지혜롭게 잘 처리하는 정치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어느 사회든지 시간이 지나면 기득권층이 형성됩니다. 그때 개혁이 없으면 기득권이 고착화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힘이 정의가 되는 부정의 현상’은 심화되면서 결국 언젠가는 그 사회가 급진적이고 비참한 파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개혁은 늘 필요한 것이고 자연히 개혁은 기득권층의 권리를 일부분 희생시키거나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개혁이 성공하려면 기득권층의 반발을 잘 처리하는 정치력이 필요합니다.

 바른 정치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기득권을 지혜롭게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기득권을 철저히 대변하는 보수는 참된 보수가 아니고 반대로 기득권을 완전히 말살하는 진보는 참된 진보가 아닙니다. 참된 보수와 참된 진보는 기득권을 잘 나누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시스템을 바꾸는 개혁의 필요성에서는 일치하는 마음을 가지되 개혁의 속도와 범위에 따라 참된 보수와 참된 진보가 나눠지는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자기를 잘 관리 감독하는 셀프 정치인이란 인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자발적으로 잘 나눔으로 바른 정치가 이뤄질 수 있는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토양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셀프 정치 및 자기 관리에 탁월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정의가 더 확대되면서 그를 향한 하나님의 칭찬과 은혜와 축복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