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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말씀에 무지한 이유

Joyfule 2015. 4. 21. 09:43

 

   교회가 말씀에 무지한 이유

 

 

교회를 수십 년간 다닌 사람들은 설교를 수천 번 넘게 들어왔을 터이다. 어떤 이야기이든 수천 번을 들으면 전문가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행위이다. 그래서 수천 번의 설교를 들어온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문가가 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기쁜 일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교회를 오래 다녀 신앙의 연륜이 적지 않은 사람들도 성경에 대해 무지한 이들이 허다하다. 거참 희한한 일이다. 어떻게 우리네 교회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그간 들어온 설교가 별 볼일 없는 가르침이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필자는 설교를 자주하는 편은 아니다. 예전에는 주일과 수요일에 두 번 정도 했는데, 지금은 주일에 딱 한번만 한다. 필자처럼 설교를 드물게 하는 목사도 없을 것이다.그러나 필자가 신학교에 다닐 때 설교학은 학생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과목이었다. 왜냐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된다면, 설교를 잘하느냐에 따라 목회성공(?)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른 목사들의 설교를 전혀 듣지 않는다. 필자가 설교를 잘한다는 교만이 들어차서가 아니라, 기도와 말씀으로 깊은 생수의 강에서 퍼오면 되기에 굳이 다른 분들의 설교를 참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를 찾아오는 분들은 대부분 교회를 오래 다녀 신앙의 연륜이 오래 되었지만, 성경의 깨달음은 차치하고 성경지식조차 형편없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랬다. 그래서 그 이유에 대해 곱씹어 보고 싶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고리타분한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고리타분한 설교란 참신한 맛이 없는 설교이다. 필자가 평신도 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설교가 그랬다. 한번 말한 예화나 비유도 여러 번 사용했다. 그 이유는 여러 번 말해도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기 때문이란다.어쨌든 설교시간이 되면 늘 들어왔던 내용이라 꾸벅 꾸벅 졸다가 예배시간을 마치기 일쑤였다. 설교가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이유는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새롭지 않다는 것은 깨달음이 없다는 증거이다. 말하자면 설교원고를 재탕 삼탕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색다른 예화나 세상 얘기를 집어넣고, 교회나 교인 얘기가 늘어나는 이유이다. 고작 20여분에 불과한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도 부족한 판에,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교회얘기로 시간을 때우고 있으니,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쌓이겠는가?

 

고리타분한 설교를 하는 목사들은, 늘 하던 본문말씀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해서 사용한다. 이러한 본문은 교회를 키우고 싶은 목회자의 탐욕을 채우는 데 걸 맞는 말씀이거나, 교인들에게 달콤한 축복을 퍼붓는 데 즐겨 사용하는 본문, 기복적인 신앙관을 부추겨서 희생적인 신앙행위나 헌금을 독려하는 데 즐겨 쓰는 말씀, 혹은 기적적인 사건이나 성경인물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데 쉬운 내용 등이다. 사실 이런 말씀은 성경에 5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말씀만을 골라 본문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교인들이 어떻게 해박한 성경지식을 가지게 될 것인가?

 

두 번째는 인본적인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인본적인 설교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설교이다. 학교나 세상에서 배우는 사고방식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면 이성적인 사고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영적인 세계를 가르친다. 하나님과 천사, 사탄과 귀신은 합리적인 사고로는 알 수도 없고 과학적인 실험으로 증명되지도 않는 존재들이다. 또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쫒아내는 등의 기적과 이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성경은 이렇게 영적인 책이며,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잘 가르쳐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책임을 진 신분이다. 그러나 이는 영적인 깨달음이 있고 영적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대는 성령의 시대이다. 성령은 이적과 기적적인 방식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목회자들이 영적 깨달음과 능력이 없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부분을 가르치게 된다.

 

이성적인 가르침이 바로 인본적인 설교이다. 그래서 형식적인 예배의식을 강조하고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권면하는 것이다. 희생의 강도를 더하면 하늘이 감동한다는 기복적인 신앙관도 이성적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심리적인 치료나 인본적인 방식의 내적치유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만으로 어떤 질병도 치유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감정적인 터치나 심리적인 치유법이 교회 내에 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인본적인 가르침이 교회에 팽배하기 때문이다. WCC에 가입하는 교단이나 교회가 늘어난 현상도 이 때문이다. WCC는 성경을 짜깁기하여 성경적인 양 내세우지만, 그들이 하는 행위는 종교다원주의를 추종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에 무속인이 나와서 초혼제를 하고 동성애자들이 참여하는 이유이다. 이는 그동안 교회에서 인본적인 설교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는 목사들이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성경말씀인 영혼의 양식을 잘 가르치고 먹여서, 양들을 기름지게 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여야 하는 신분이다. 그런데 신앙의 열정이 있으면 사명을 받았다는 부추김에 속아서, 죄다 신학교에 가서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다. 그러나 가르치는 데 재능도 없고, 부족한 재능을 보완해줄 노력도 하지 않은 이들이, 설교시간에 국어책을 읽듯이 설교를 하니 교인들이 꾸벅꾸벅 졸거나 딴생각을 하다가 예배시간을 마치게 된 된다. 목사는 지식과 지혜의 은사는 물론이고, 잘 가르치는 재능을 계발해서 제자를 양육하여야 한다. 그러나 시중에 나와 있는 설교 CD를 복사해서, 판박이 하듯 하는 설교로 때우는 이들이 넘쳐난다. 시중에 유통되는 설교 CD에 들어있는 설교가 아무리 명설교문이라고 해도, 자신이 소화해서 잘 먹이지 않으면 허접 쓰레기일 뿐이다. 이처럼 가르치는 재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은 이들이 설교를 하고 있으니, 수십 년간 그들의 입만 보고 지낸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해박할 수 있겠는가?

 

물론 설교만 많이 듣는다고 말씀의 깨달음이 풍성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목사라면 성경 전문가이며 가르치는 데 달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도와 말씀으로 피나는 노력을 하든지, 뼈를 깎는 투혼을 하기 싫다면 목사직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이들도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허접한 설교를 바꾸지 않는 목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이들이 불쌍하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시는데,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채, 교회마당만 밟는 이들의 운명이 불 보듯 환하기 때문이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