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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회의(교리 논쟁)

Joyfule 2019. 6. 8. 15:35


 

    교회회의(교리 논쟁)

 

 


신약교회 후 교부들 시대까지는 세계적인 기독교 회의가 없었다. 다만 한 지방에 국한된 종교회의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3세기에는 칼타고,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 지방대회가 열렸고, 4세기 초까지 지방대회가 더 확산되었다.
그러나 AD313년 콘스탄틴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후부터는 세계적인 교회회의가 열리게 된다. 그래서 313년부터 580년 초대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즉위할 때까지 교회 회의는 여러 차례 거듭된다.
그러면 이전까지는 기독교가 계속 박해와 핍박을 받아오다가 비로소 교회회의를 세계적으로 열 수 있게 되는 그 배경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콘스탄틴 황제를 비롯한 모든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를 정치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불순한 저의가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승인했으나 그야말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공적을 세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공적은 있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회의시대를 연 여러 사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대대적인 박해 후에 온 승리


데키우스(AD249-251)와 발레리안(AD253-260, Valerian) 황제들의 박해 후 상당기간은 비교적 평온한 시대를 보낸다. 그런데 '디오클레티안'(AD303-311, Diocletian)황제 때에는 가장 극심한 박해가 발생한다.
이 시기의 박해는 기독교 최대최고의 박해기간이었다.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제국을 재 정비하고 새로운 번영을 기할 목적으로 로마 전체를 4명의 황제가 분할 통치하도록 했다. 그래서 동방에는 디오클레티안 자신이 맡고 서방에는 '막시미안'(Maximian)에게 맡겨서 이들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 하여 일종의 대제와 같은 책임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대제 밑에는 '시저'(Caesar)라 하여 부제의 일을 하였다. 그래서 동방의 디오클레티안 밑에는 '갈레리우스'(Galerius)가 부제였고, 서방 막시미안 밑에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가 부제였다.
'디오클레티안'황제는 제국의 분열과 내란을 권력분할로 막아보려고 이 같은 일을 시도했으나 그의 소망은 이루지 못한다. 그것은 자기 아내 '프리스카'(Prisca)와 딸 '발레리아'(Valeria)가 모두 기독교 신자였는 데도 자기 밑에 있는 '갈레리우스' 부제의 사주로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박해 명령을 내리게 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303년에 '디오클레티안'황제 칙령이 선포되어 교회 건물은 파괴되고, 기독교 서적들은 불탔으며, 기독교 신자들은 일체의 공직에서 파면되었다. 그러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황제 명을 거부함으로 고문과 처형이 자행된다. 이 무렵 황궁에서 두 차례의 화재가 발생한다. 이 불을 지른 범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운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안 황제로 하여금 더 큰 박해명령을 내리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안 자신도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이교 제사를 명하였다.
이렇게 되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압력에 굴복하는 배교자가 생겼고, 소수는 잔인한 고문과 악독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305년에는 디오클레티안과 막시미안이 퇴위하고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대제가 된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 콘스탄틴이 서방 부제가 되고, 또 갈레리우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동방 부제가 된다.
갈렐리우스가 AD311년에 죽자 로마 제국은 콘스탄틴, 막센티우스의 대제와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 부제에 의해 4등분으로 분할된다. 그런데 서로가 제국을 장악하려다가 결국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전쟁으로 압축된다.
두 사람은 312년 10월 28일에 이탈리아의 '밀비안'(Milvian) 다리 위에서 싸우다가 막센티우스가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이로써 콘스탄틴이 제국 전체의 주인이 된다.


막센티우스를 이긴 콘스탄틴은 라키니우스와 313년에 밀란(Milan)에서 만나 전쟁을 중지할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그 유명한 '밀란칙령'(Edict of Milan)을 AD313년에 내려 기독교 박해의 종식을 가져온다.
황제에 의한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AD64년에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수백년간 계속되었고 AD313년에 가서야 끝이 난다. 이로써 기독교는 더 이상 황제의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게 된다. 실로 총력적인 대 박해 후에 온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