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회의(교리 논쟁)
(1) 니케아회의(AD325, Nicea)
1) 니케아 회의가 소집된 원인
니케아대회는 기독교 세계대회의 효시가 된다. 이 대회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되는 대회이다. 그러면 니케아회의는 왜 열리게 되었는가?
교회 안에서 생겨진 교리적 논쟁이 크게 확대되어서 이 문제 수습을 위한 것이 그 원인이 된다.
최초의 문제는 기독론에 관한 문제였다. 과거 교부들 때에 이미 기독론에 관한 문제성있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저스틴(Justin)은 말하기를 '성부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며 성자인 로고스(Logos)는 단지 제2계급에 속하는 신적 존재'라고 하여 성부와 성자간에 차별이 있다고 했다.
그후 터툴리안(Tertullian)도 '3위는 본질이 셋이 아니라 양식이 셋이며, 능력이 셋이 아니라 표현이 셋'이라는 기묘한 법적 용어로 설명했으나 이 주장 역시 불분명한 설명이었다.
다음에 오리겐(Origen)은 아들은 '성부로부터 산출된 제2의 하나님'이라고 했고, 성자는 성부에게 산출되었으나 계속하여 성부를 지원한다고 해서 종속설(Subordinationism)을 설명해왔었다.
이와 같은 교부들 주장은 안디옥의 신학자요 감독인 '사모사타의 바울'(AD260-272, Samosata)의 영향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장로가 된 '아리우스'(Arius)에게서 비롯된다. 아리우스는 안디옥에서 사모사타의 바울과 유명한 신학자인 루시아누스(Lucianus)에게서 배운 대로 자기 주장을 하였다.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가 다른 선지자보다 강력하게 작용하여 로고스가 되었다고 보고 예수가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다음에야 하나님은 그에게 신성을 부여하였다고 했다. 바울의 이 같은 주장으로 안디옥 교회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런 영향을 받은 아리우스는 안디옥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바울의 주장을 답습하였다.
아리우스는 키가 육척이 되고 변설이 명쾌하여 논리가 정연하였고, 또 정열적인데다가 금욕적인 생활을 했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아리우스는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하였다. 즉, 예수는 본래 신의 본질로 처음부터 있는 분이 아니고 창조함을 받은 장자이므로 영원치 못하며 그 본질에 있어서도 아버지는 시작이 없으나 아들은 시작이 있음으로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고 제2의 신이라고 하였다.
또한 예수는 인간의 육체는 가졌으나 인간의 영혼은 갖지 않았다. 예수는 인간들의 영혼이 아닌 로고스를 가졌다. 따라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닌 중간적 존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인 '알렉산더'(Alexander)의 예수의 신성 주장에 반대되므로 알렉산더는 '알렉산드리아' 대회를 소집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설을 정죄하였다(AD320-321). 그리고 아리우스를 따르는 자들도 함께 파문하였다.
그렇지만 아리우스와 같은 안디옥 학교 동문인 니코메디아(Nicomedia)감독 유세비우스(Eusebius)가 동방교회에서 막강한 힘으로 아리우스를 지원하였다. 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 황제의 측근자로 그 세력이 대단하였다. 여기에 힘입은 아리우스는 「탈리아」(Thalia ; 잔치라는 뜻)라는 책을 통해 대중노래로 자기 주장을 보급하였다.
그러다 보니 정통신앙을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자유로운 새 사상을 주장하는 안디옥 교회 출신자들 사이에 심한 논쟁과 함께 반목이 증폭되어 갔다.
교회가 이렇게 대립되어 가는 것을 콘스탄틴 황제가 크게 염려하여 국가통일의 성업을 위해서는 국론이 하나되어야 한다고 믿고 두 파간의 분쟁을 종식하도록 노 감독 호시우스(Hosius)로 하여금 칙서를 내려 조정을 시도했으나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콘스탄틴 황제는 최후 수단으로 전 로마제국 안에 있는 모든 감독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교회가 다 하나라는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세계 교회대회에서 결정하도록 국가가 그 힘을 미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AD325년 5월 20일에 전 로마제국 안의 감독회의가 황제에 의하여 소집된다. 황제는 안내장을 각 감독에게 보내서 장로 2인과 수행자 3인이 국가에서 지급하는 왕복 여비와 체재비를 부담하여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때 모인 감독의 수는 약 300명 정도였고, 서방교회에서는 겨우 6명만 왔다. 그 이유는 먼 길에다 헬라어를 몰랐고, 또 박해 때 불구가 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로마교회는 감독이 연로하여 2명의 장로로 대리케 하였다.
2) 회의 결과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주장자들이 모였다. 먼저 알렉산드리아 교회파의 감독 약 20명 중 수석 책임자는 알렉산더 감독이고, 수행자 대표로 아다나시우스, 그리고 아리우스파 감독 약 20명 중 수석 책임자는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 수행자 대표는 아리우스, 또 거의 대다수였던 중간파 중 수석 책임자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로 유명한 역사가였고, 어용신학자라고 혹평을 받던 자였다.
개회날이 되자 콘스탄틴 황제가 회의장에 참석하였다. 사회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맡았고, 황제가 라틴어로 개회사를 하였다. 회의의 의사진행은 호시우스와 유세비우스가 하였다.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18인의 감독과 함께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다만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 본질이 비슷할 뿐(Homo ousious= like substance) 본질이 동일한 것(Homo ousion= like substance)은 아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Arius의 주장은 즉각 반대에 부딪히고 회의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절충안을 제출하였다. 이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로 인하여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유세비우스는 교회가 분쟁으로 싸우기 보다는 서로 양보하고 평화를 유지하자고 제의하고 적당한 절충안을 제출한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지음을 받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시니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을 가졌을 뿐이다'(Homoiouisos)고 했다.
회의가 한창일 무렵 정통신학의 수호자인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계자로 '아다나시우스'(Athnasius)가 책임을 계승하게 된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이며, 아들도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신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만일 아들이 피조물이라면 아들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신과 인이 결합되는 '성육신'(Incarnation)한 분이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이 회의의 대세를 판정하였다. 그래서 결국 아다나시우스의 동질론이 다수의 동조로 가결된다. 그 결과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것을 수정하여 니케아신조가 채택된다.
이 신조에 참석한 회원들이 전부 서명을 하는데 아리우스와 애굽의 두 감독이 서명을 거부함으로 그들은 일루기아 지방으로 유형판결을 받는다.
그리고 니케아회의는 교회정치에 관한 22개조를 결정하고 또 부활절을 아다나시우스가 주장한 대로 춘분 후 만월 다음의 일요일로 정한다. 그리하여 7월 29일, 황제 즉위 20주년 기념축연을 갖고 폐회된다.
그런데 그후, 대회를 승리로 이끈 아다나시우스는 체구가 왜소하고 젊은 대집사(27세)여서 황제의 번의로 계속 핍박을 받았다. 그는 황제에 의해 다섯 번에 걸친 추방이 있은 후 아다나시우스의 정통입장은 전체적 지지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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