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회의(교리 논쟁)
2. 콘스탄틴 대제의 인물
(1)인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콘스탄틴 황제는 어떤 인물인가?
콘스탄틴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는 앞서 언급한대로 서방 대제인 막시미안(Maximian) 밑의 부제였다.
클로루스는 헬라 여인이며 여관집 딸인 헬레나(Helena)와의 사이에서 아들 콘스탄틴(Constantin)을 AD272년에 얻게 된다.
콘스탄틴은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으로 소년기를 보낸다. 그런데 콘스탄틴이 장성했을 때 아버지 클로루스는 정치적 목적으로 헬레나와 이혼을 한다. 그리고 클로루스는 대제 막시미안의 딸인 데오도렛(Theodoret)과 재혼한다. 그런데 그녀 역시 기독교 신자였다.
콘스탄틴 자신은 모친들의 신앙적 감화보다는 부친의 영향으로 막강한 군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차후에 대권을 장악하면 기독교를 통한 국가발전에 도움 받을 생각을 할 정도로 기독교에 호감을 가졌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정직한 무리이고 균형잡힌 삶을 사는 이들이며,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강하므로 그것을 황제를 향한 충성심으로 선용하면 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그가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에서 적장 막센티우스와 싸우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즉, 콘스탄틴이 꿈 속에서 기독교 상징을 병사들이 방패와 군기에 부착하면 승리한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이 콘스탄틴의 회심이 아니었을까 상상하지만 그는 평생동안 태양신도 섬기고 기독교도 이용한 것을 보면 그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평생동안 침례를 받지 않다가 드디어 화급한 나머지 죽기 직전에 임종세례를 받게 된다(AD337). (비교 참고 : 카톨릭의 교권제도가 창설되었을 때에 그 통솔자가 되었던 「콘스탄틴」 그 자신은 당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마는 그와 함께 이 조직체 안에 들어온 그릇되고 정도를 벗어난 교회들이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이 과오를 채택함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심각한 의문이 「콘스탄틴」의 머리속에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니 즉 「만약 내가 침례로 말미암아 내 죄를 씻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침례를 받은 후에 범하게 될런지도 모르는 내 죄는 어떻게 될것인가?」 그는 후세의 모든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질문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침례는 아직 범하지 않은 죄 까지라도 씻어 버릴수 있는 것인가 또는 침례받기 전에 범한 죄를 한가지 방법 즉 침례로써 씻어 버릴수 있으면 침례 받은 후에 범한 죄도 다른 또 하나의 방법으로써 씻어 버릴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일어나는 여러가지 의문을 원만히 해결할 수 없었음으로 「콘스탄틴」은 결국 기독교도들과 연합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침례만은 자기가 범한 모든 죄를 한꺼번에 씻어 버릴수 있다고 생각해서 죽기 직전에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다 - 피흘린 발자취, J. M. 캐롤 저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but, 전도서 9장 12절 말씀에는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그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장자를 죽이고 그의 처도 죽이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등 단점도 많았으나, 정치적 역량은 대단하여 놀라운 공적들을 많이 남기게 되었다.
(2)업적
콘스탄틴 황제가 과연 신앙인이었는가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그가 끼친 영향력이 너무 심대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로 그의 업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기독교에 끼친 공헌
콘스탄틴 자신은 스스로 기독교 보호자로 자인하였다. 그러나 그가 평생동안 이교신을 버리지 않고 이교의 대사제로서 기능을 다 한 것을 보면 그가 꼭 기독신자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에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 기대를 갖고 기독교에 호의적 정책을 편 것은 사실이다.
콘스탄틴 입장에서 보면 크게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으나 기독교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큰 사건들이 많았다.
먼저 전에 디오클레티안 황제 때 교회 재산을 몰수했던 것을 다시 되돌려주도록 하였고, 스페인의 코르스도바(Corsdova) 감독인 '호시우스'(Hosius)를 황제 자문역으로 삼아 황제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또한 모든 성직자들에게는 세금 감면과 군대 징집면제 등으로 우대하였다. 이 때문에 콘스탄틴은 원로원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았다. 그러나 전능한 권위로 원로원을 억누르고 나갔다.
그리고 로마 화폐에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상징하는 표시와 아울러 로마의 옛 신들의 상징을 함께 주화하였으며(320년), 태양숭배신이 '지존의 존재'(The Supreme)에게 경배하듯 일요일을 기독교의 예배일로 정하도록 했다. 전에는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일과 주일에 드리는 이중 관행을 콘스탄틴이 하나로 일원화시켰다(324년).
콘스탄틴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일을 12월 25일의 태양신 예배날로 정했다. 그 이전에는 주현절로 1월 6일을 지키던 것을 이교도의 축하날로 옮기자 이교도들 역시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 종교회의(The First Ecumenical Council)를 니케아에서 열도록 했으며, 그 회의는 황제에 의해서 소집된다. 또한 그는 그의 생모인 헬레나가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예수의 처형지를 발견했다고 하여 베들레헴에 '성탄교회'(The Church of the Nativity)와 감람산 교회에 두 개의 기념교회를 국고금 지원하에 건립하기도 했다(AD325-329년).
그가 330년에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그리이스의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를 할 때 아내의 소유였던 로마의 '라테랑궁'(Lateran Palace)을 교회에 기증한다. 이것을 'Donation of Constantin'이라고 하는데 이 궁은 오늘날 교황청 바티칸 궁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가 교황들에게 서방 전체를 다스리도록 권한도 부여했다고 주장한다. 저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에 의해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기독교에게 여러 면으로 선심을 썼기 때문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인 황제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교활한 정치가로 자기 정치적 야망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한 정치가였다. 그것은 그가 로마제국의 수장으로서 대사제의 칭호와 임무를 다했으며, 또한 그의 사후를 계숭할 세 아들들을 신(이교의 신)으로 선포한 원로원의 소행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콘스탄틴은 그가 대권을 장악한 후 이교도의 쇠퇴를 가져오고 기독교에 선심을 쓰는 황제이긴 했으나 콘스탄틴 그 자신이 로마제국 국교였던 이교(Paganism)도의 대 사제행위를 평생동안 수행한 것이나 그의 자식들에게 신의 호칭을 받게 한 것은 그가 기독 신자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2) 황제로서의 업적
콘스탄틴 황제는 여러 면에서 업적이 다양하다.
① 콘스탄티노플의 건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330년에 이탈리아 로마의 수도를 옮겨 그리스 비잔틴에다 '새로운 로마'(New Rome)인 '콘스탄틴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일이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다리가 될만한 곳이고,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해역의 요충지에다 그의 사령부를 설치할 필요를 느꼈다. 그 당시 상황은 이 같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에 너무 좁은 장소였다. 그렇지만 새 평야에 성벽을 쌓아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다.
콘스탄틴은 새 수도를 장식할 자원과 물자조달을 위해 제국 산하의 전 지역을 뒤져서 모든 것들을 운반하였다. 아폴로상, 전차 경주장, 공동목욕장, 광장 등을 설치해놓고 이곳에 주민을 유치하기 위해 납세와 국방의무를 면제해 주고 콘스탄티노플 시민에게는 기름, 식량, 포도주를 무상으로 배급해 주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렇게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로마제국의 정치, 문화도시로 조성함으로 동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Byzantium Empire)이라 불려지며, 1천여년 동안 동로마의 중심지가 된다.
그와 반대로 서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는 야만족들의 계속적인 침략으로 약화되다가 드디어 476년에 망하고 만다. 서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는 정치적 핵심이 빠져나가서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종교적 중심부가 되어 중세 카톨릭교회의 중심지로 발전된다.
② 각종 악법의 개정
고대로부터 전해오던 십자가형 제도를 폐지하고 검투제도를 금하였다. 또 축첩과 간음을 엄금하고 이혼권을 제한시켰다. 또 부인에게도 재산소유권을 부여하며 각종 여성보호법도 제정했다. 그리고 죄인 이마에다 인두로 낙인하는 법을 없앴다.
③ 일요일의 제정
일요일을 정하여 농부 외에는 모든 영업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일요일에는 군대훈련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교회재산 감리법을 정하여 교회에서의 기부금을 공인하도록 하였다.
④ 기독교뿐만 아니라 타 종교에도 박멸정책을 쓰지 않았다. 타 종교에서 실시하는 제사 중에 불결하거나 잔혹한 것은 금하였다. 그리고 우상들은 산당에서 옮겨다 박물관이나 공원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⑤ 콘스탄틴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이거나 또는 자기 이름을 영원토록 남기려고 독특하게 지은 교회 건물들이 남아있다. 소위 '바실리카'(Basilica)라 불리우는 직사각형 건물양식이 있었다. 이 바실리카 건물의 특징은 기독교 예술이라 할 수 있는 '모자이크'(Mosaic) 양식 등이 그것이다.
3) 콘스탄틴 황제의 후계자
콘스탄틴이 AD337년에 65세로 세상을 떠나자 콘스탄티노플에 안장되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죽은 후 로마는 그의 세 아들에 의해 3등분으로 분배된다. 큰 아들 '콘스탄틴 2세'(AD337-340)는 전사하고, 둘째 아들 '콘스탄스'(AD337-350, Constance)는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그래서 셋째인 '콘스탄티우스'(AD337-361, Constantius)가 천하를 다 소유하게 된다.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그의 사촌 아우 '쥴리아누스'(AD361-363, Julianus)가, 그 다음에는 '주비아누스'(AD363-364, Juvianus)가 계승한다.
'━━ 영성을 위한 ━━ > 기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회의(교리 논쟁) (0) | 2019.06.12 |
---|---|
교회회의(교리 논쟁) (0) | 2019.06.11 |
교회회의(교리 논쟁) (0) | 2019.06.08 |
새벽 기도회의 최초 발상지와 통성기도의 시작은? (0) | 2019.06.07 |
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8) (0) | 2019.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