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싶은 그림 - 최민자
빗살무늬토기를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다. 누가 이 질박한 흙그릇에 처음으로 무늬 넣을 생각을 했을까. 왜 꽃이나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지 않고 어슷한 줄무늬를 아로새겼을까.
누군가 날카로운 뼈 바늘 같은 걸로 그릇 아가리에 첫 획을 긋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감격하여 가슴이 뛴다. 그는 어쩌면 인류 최초의 추상화가였을지 모른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가 들소 그림 같은 사실화인데 비해 신석기의 빗살무늬는 리드미컬한 기하학 문양이다. 그 가는 빗금 하나가 현대 미술의 주 흐름인 추상성으로 이어져 왔음을 생각하면, 달에 첫 발자국을 낸 암스트롱 만큼이나 위대한 첫 손자국이 아닌가.
미술사학자 보링거(Wilhelm Worringer)에 의하면 인간의 추상 충동은 인간 내면과 외부 환경과의 부조화에서 오는 불안심리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는 신석기 토기의 빗살무늬를 ‘공간에 대한 공포’로 해석한다. 원시공동체였던 구석기 시대 이후 계급과 소유가 생겨나고, 그로부터 야기되는 불안이 현상 너머의 초월적 질서를 추구하게 되어 토기의 빈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려는 무의식적인 리듬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인간과 외계 현상 사이가 비교적 행복한 친화 관계일 때는 사실주의가, 변화와 불안이 많은 시기엔 추상주의가 유행했다 하니, 20세기 이후의 추상적인 흐름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듯도 싶다.
빗살무늬를 다시 바라본다. 이 정교한 사선의 시작은 사냥나간 남정네를 기다리던 젊은 아낙의 초조함에서 출발했을 것 같다. 무심히 동굴 밖을 내다보다가 때마침 휘몰아치는 빗줄기를 보고 불안해진 마음이 무심한 빗금으로 형상화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비 때문에 사냥을 못나간 사나이의 우연한 손놀림일 수도 있다. 그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에 대해 안정되고 질서정연한 규율을 추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공간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았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시간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산다. 그들은 황량한 벌판에 홀로 남겨질 듯한 두려움으로 그릇 표면을 빼곡이 채웠지만, 우리는 빈 시간에 대한 강박의식 때문에 하루를 빽빽하게 채우려 든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공간적 거리의 의미는 축소되고 속도와 시간이 경쟁력이 된 시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야말로 인간의 중요한 행동양식이라는, 한 사회심리학자의 말을 사람들은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느긋함이 게으름으로, 유유자적이 빈둥거림으로 전도된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일하는 것은 여유보다는 무능에 속한다. 남의 밭에는 곡식이 푸른데 홀로 땅을 놀리는 기분이랄까. 거두든 못 거두든 심고 가꾸는 척 허둥거려야 스스로 조금 위안이 된다.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일수록 일정이 꽉 짜여 한가할 틈이 없다. 이동전화를 옆에 차고 이동수단을 바꿔가며 도시라는 사냥터에서 유목민처럼 살아간다. 돈과 권력, 지식과 정보, 사랑과 쾌락 ─ 원하는 사냥감은 제각기 달라도 무엇에 쫓기듯 무엇을 좇으며 낮도깨비처럼 밖으로 떠돈다. 한 여행 가이드의 말을 빌리면 한국 사람들에게는 여행마저도 휴식이나 충전의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한 군데서 여유 있게 쉬는 것보다는 힘들게 다리품을 팔아가며 여기저기 지치도록 끌고 다녀야 본전 생각을 덜한다는 것이다.
박물관 전시실을 기웃거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도 내 일상의 빗금긋기에 다름 아니다. 빈 시간, 빈 가슴을 채워두기 위하여 남들처럼, 유행처럼 빗금을 긋는다.
촘촘히 채워진 시간의 무늬에 그럴싸한 제목을 붙여본다. ‘無題’ 또는 ‘作品 4-7’……. 모호하다. 나조차 내 그림을 알 수가 없다. 이것들이 정녕 내가 그리고픈 그림은 아니다. 빗살무늬 대신 조선 백자의 넉넉함을, 동양화의 여백을 그리고 싶다.
여백이란 비어 있음의 표현이지 그리고 남은 허드레 공간이 아니다. 마음의 통풍과 영혼의 소통을 계산하여 일부러 비워두는 원만함일 뿐, 그릴 게 없어 비워둔 자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백자를 빚고 사군자를 치던 선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빈 동굴에 메아리가 퍼지듯 비어 있음이 울림을 만드는 이치를.
이제는 좀 비워두고 싶다. 촌스럽고 한물 간 유행이라도 꽃과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고 싶다. 텅 빈 하늘에 노을 한 자락, 꽃향기를 그리워하는 새의 노래, 그 넉넉한 여백을 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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