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방렴 - 정성화
영화 ‘오아시스’가 마침내 베니스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았다. 기쁜 일이고 당연한 결실이다. 내가 그 영화에 대해 진작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자 주연배우에 대한 기사 때문이었다.
‘벗은 종두의 가슴이 앙상하다’라는 시나리오의 지문 한 줄 때문에 그는 이 영화를 찍기 전 무려 18Kg이나 체중을 줄였다고 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선악이 공존하는 광기 어린 눈빛을 보이며,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했던 배우다. 자신이 맡은 역에 완전히 몰입하여 우리 삶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그에게서 나는 진정한 프로정신을 느낀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몰입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감탄스럽다. 천 켤레도 넘는 연습용 토슈즈(toe-shoes)를 신었다는 발레리나 강수진, 자신의 기량을 천재성이 아닌 맹훈련덕택으로 돌리는 브라질의 스트라이커(striker) 히바우두, 또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에 철학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다는 첼리스트 장한나 등. 그들의 삶에 바코드 리더기(bar-code reader)를 들이댄다면 아마 “열정”이라고 찍힐 것이다.
그런 열정을 부러워하며 내 속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나의 더듬이가 쏠리는 곳이 한 군데 있긴 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소망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네 삶과 맞물려있는 글, 인생살이의 감동을 격하지 않은 어조로 조근 조근 들려주는 수필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어떤 수필은 지난날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거나 회한에 빠져들게 했다. 또 어떤 수필은 스쳐 지나간 인연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간혹 자신의 자랑거리를 늘어놓거나 제 설움에 겨워 긴 넋두리를 해대는 수필도 있었으나, 쌀에 섞인 ‘뉘’쯤으로 이해하면 될 일이었다. 너부데데한 일상에 지쳐있을 때 누군가 입에 넣어준 박하사탕 같은 글, 한 문장으로도 전체를 품어내는 미학적인 글, 그리고 지성(知性)과 감성(感性)을 한 합(合)에 담아내는 글을 만났을 때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너무 관조 일변도이거나 지나치게 현학적인 글을 만났을 때는 머릿속이 얼얼했다.
수필에 끌리면서도 수필이 두려웠다. 만일 내가 용기를 내어 수필 쓰기를 시작한다고 해도 그 다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때 떠오른 것이, 내 몸속에 수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을 풀어줄 약도 분명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살아있는 목숨이란 어느 것이나 양면성을 갖고 있게 마련이므로. 그 생각이 나의 수필 쓰기의 바탕이 되었다.
허나 지금 나는 길 위에서 길을 잃은 듯하다. 차분히 밀고 나가는 사색이 부족한 탓일까. 간밤에 일어난 사건 사고 위주의 글을 쓰다 보니 ‘별 일’이 없으면 나의 글쓰기 공사는 이내 중단되고 만다. 이를테면 하늘만 쳐다보는 ‘천수답’ 수필인 셈이다.
그 동안 내가 쓴 글은 주로 가난한 시절에 대한 보고서이거나 라디오 오락프로에나 어울릴만한 글이었다. 조금 쓸 만하다 싶은 글 역시 잦은 동종교배(同種交配) 때문인지 잎이 시들하고 줄기가 약하다. 조금 잘 되었다 싶은 글은 지면(紙面)에 발표하는 것과 동시에 ‘어제 내린 눈’이 되어버리고, 함량 미달의 글은 전과기록처럼 나를 따라 다닌다.
글밭을 확 갈아엎어 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느끼는 막막함 못지않게, 글을 쓰지 않을 때는 그만한 공허감이 밀려온다. 어느 쪽이나 끝이 안 보인다는 게 문제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쓰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하며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수필 모임의 행사 중에 가끔 단체사진을 찍는다. 어지간히 못난 놈들도 자기 형이나 동생과 나란히 서 있으면 한결 번듯해 보이듯, 유명한 문인들 사이에 끼여 웃고 있는 내 얼굴도 그렇게 보였다. 글은 제대로 쓰지 않으면서 번듯한 자리부터 꿰차고 있는 듯하여 몹시 부끄러웠다. 그래서 마음을 다져먹었다, 치열한 작가정신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어보자고.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은 송화에게 말한다. “속에 응어리진 한(恨)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해라”라고. 그 말을 글에다 적용하면, 자신의 체험이나 넋두리를 죽 늘어놓을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삶의 의미와 진정성을 표현해 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수필을 낚는 방법으로 나는 죽방렴을 생각하고 있다. 죽방렴이란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멸치를 통발에 가두어 놓고, 물이 다 빠지고 난 뒤에 뜰채로 건져 올리는 방법이다. 이렇게 잡은 멸치는 그물로 잡은 멸치보다 신선도가 높아서 맛이 한결 고소하고 쫄깃하다고 한다.
밀물 따라 들어온 멸치 떼를 보고도 썰물이 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수필을 쓰기 전 사색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참나무 말뚝만 쓴다는 것은, 참나무가 된 마음으로 글을 쓰면서 글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집중하라는 의미가 되겠다. 그렇다면 그물보다 뜰채를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글에 지나친 기교를 부리지 말라는 뜻이 아닐는지.
내 속에 죽방렴 하나 걸어놓고 밤마다 은빛 멸치 떼 파닥이는 소리에 밤잠을 설치고 싶다.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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