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장영희가 둘? - 장영희

Joyfule 2015. 6. 19. 11:43

 

[이탈리아] 베네치아 가면축제 카니발

 

장영희가 둘? - 장영희

 

 

얼마 전 동료 교수 하나가 웃으면서 어떤 학생이 나에 대해 한 말을 전했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영어 신문이나 다른 글들을 통해 알았던 장영희 선생님하고 수업 들으면서 뵙는 선생님은 영 딴판이에요. 글 속 선생님은 아주 온화하고, 낭만적이고, 감상적이기까지 한데, 교실에서 만나는 선생님은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고, 점수도 되게 짜요.”

 

 사실 내가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인간 장영희와 글 쓸 때 장영희를 둘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내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학생의 말처럼, 글 속 장영희는 섬세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데 반해 실제로 만나는 장영희는 아주 무뚝뚝하고 직설적이고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나도 간혹 누가 진짜 장영희인지, 아니면 적어도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생각해 보곤 한다.

 

 일상 속 나는 깐깐하고 엄격한 선생님,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좋아하는 원칙론자, 감상을 배제하고 효율성을 따져 이성적으로 결정하는 기능주의자,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완벽주의자,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감각한 실리주의자, 속전속결의 현실주의자, 무슨 말이든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회의론자이다. 내겐 분명히 그런 구석이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내 모습도 있다. 그것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을 정도로 마음 여리고 다른 사람들 역경을 안타까워하며 잠을 설치고, 부끄럼 잘 타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문자 그대로 믿는 순진무구함, 게다가 구제 불능의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 감상주의자, 실수투성이에 후회 덩어리…. 그것도 분명 나다. 그러니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나도 단정 짓기 어렵다.

 

 그런데 지난 며칠 사이에 받은 편지 두 장은 이러한 나의 정체성 혼돈에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하나는 몇 년 전에 졸업한 학생에게서 온 것이고, 또 하나는 여기 저기서 내 글을 보았다는 독자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편지 모두 비슷한 말로 나를 평가하고 있었다. 우선 학생에게서 온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장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선생님께서 몸이 불편하신 분이라는 것을 잊습니다. 그저 선생님의 밝은 웃음과 빠른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그 당당함을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삶에 대한 생동감으로 가득 차고 울퉁불퉁한 인생길을 멋지게 운전해 가시는 분입니다. 선생님의 맺고 끊으심이 분명한 태도,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만하신 모습, 선생님처럼 재미있게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그 웃음까지도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우체국에 근무한다는 독자는 편지와 함께 슈베르트의 <숭어>가 담긴 시디를 동봉해 왔다.

 “선생님 글을 읽을 때면 이 노래가 생각납니다. 선생님은 항상 행복하고 유쾌하고 솔직하신데, 그것은 선생님께서 갖고 계시는 자신감, 당당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밀을 얘기해 주세요. 삶 앞에서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당당할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두 편지가 다 내 삶에 대한 당당함과 확신을 말하고 있었다. 그건 좀 의외였다. 정말 그런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로 분열된 장영희는 수긍이 가지만, 그들의 지적처럼 나는 정말로 자신만만하게 인생길을 멋지게 운전해 가고 있는가? 적어도 이에 대한 답은 나 스스로 확실하게 알고 있다. 절대로 아니다. 아니, 얼토당토않은 소리이다.

 

 <미국인>이라는 소설에서 헨리 제임스는 한 인물에 대해 “그는 불운을 깨울까 무서워 발끝으로 살짝 걸으며 살아갔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나다. 마치 지뢰밭을 지나가듯, 외줄 타기를 하듯, 조심조심, 언제라도 뒤통수를 맞을까 봐 벌벌 떨며 한 발짝 한 발짝 내밀고 있는 게 바로 나다. 그래서 나는 항상 무엇인가 걱정하고 조바심하고, 주저하고 결단하지 못하고 불확신에 차 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들은 나 아닌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가? 없는 글재주로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짧은 글 하나를 소개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영어로 쓰인 글인데, 오래전 어떤 잡지에서 읽고 복사해서 노트에 끼워 두었던 것이다. 누가 쓴 것인지, 원전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글이다.

 

 

가면

 

 나한테 속지 마세요.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나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몇천 개 가면을 쓰고 그 가면들을 벗기를 두려워한답니다. 무엇무엇 하는 “척” 하는 것이 바로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죠. 만사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되어 가고 있다는 듯,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이는 것이 내 장기이지요. 그렇지만 내게 속지 마세요. 내 겉모습은 자신만만하고 무서울 게 없지만, 그 뒤에 진짜 내가 있습니다. 방황하고 놀라고 그리고 외로운…. 그러나 나는 이것을 숨깁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나는 나의 단점이 드러날까 봐 겁이 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할 수는 없어요. 어떻게 감히 당신께 말할 수 있겠어요. 나는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받아주고 사랑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무시하고 비웃을까 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비웃는다면 나는 아마 죽고 싶을 겁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게 밝혀지고 그 탓에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할까 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나는 당당함의 가면을 쓰고 필사적인 게임을 하지만, 속으로는 벌벌 떠는 작은 아이입니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관해서 무엇이든 얘기하고 중요한 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 내가 말하는 것에 속지 마세요. 잘 듣고 내가 말하지 않은 것,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내가 말해야 하지만 말하지 않은 것을 들어주세요.

 

 그렇지만 나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것이 싫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게임이 싫습니다. 나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진짜 내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도와줘야 합니다. 내가 절대로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도 당신은 내게 손을 내밀어 줘야 합니다. 당신만이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버리게 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친절하고 부드럽게 나를 대해 주고 나를 격려해줄 때, 정말로 나를 보듬어 안고 이해해줄 때, 나는 가면을 벗어 던질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야말로 내 속의 진짜 나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숨어서 떨고 있는 벽을 허물고 가면을 벗어 던지게 할 수 있는 사람도 당신뿐입니다. 당신은 나를 불안과 열등감, 불확신 세계에서 해방해 줄 수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지 말아 주세요. 그것은 당신께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두려움과 가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회의의 벽을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더욱 가까이 올수록 나는 더욱더 저항해서 싸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과 용납, 관용은 그 어느 벽보다 강합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그 벽들을 무너뜨려 주세요. 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는 아주 상처받기 쉽고 여리기 때문입니다. 내 가면을 벗기고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사랑해 주세요. 나는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당신이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입니다. 나는 바로 당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