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람의 이야기
아달베르트 폰 샤미소라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18세기 말에 태어나서 19세기 초에 활동했던 작가였는데,
다른 작품들은 알려진 게 없고,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라는
한편의 짧은 소설만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인공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를 회색 옷을 입은 낯선 남자에게 파는 대신
그 대가로 금화가 마구 쏟아져 나오는 돈주머니를 받게 됩니다.
이 마술 돈주머니가 가져다줄 부와 명예에 도취되어
자신의 그림자를 팔아버린 슐레밀은
그 때부터 다니는 곳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고, 사람들은 그를 피하게 됩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슐레밀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슐레밀의 그림자를 샀던 회색옷의 낯선 남자는
이번에는 그림자를 되돌려주는 대가로 슐레밀의 영혼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슐레밀은 이번에는 그의 요구를 물리치고, 차라리 은둔자로 살기로 합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실연과 인간적 배신으로 그의 참담한 삶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우연히 한걸음에 7마일을 가는 요술장화를 얻게 되어,
그것을 가지고 세계각지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아마도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읽으신 분들도 계시겠는데,
이야기만 보면 동화 같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만만치 않은 소설입니다.
‘그림자를 팔아버렸다, 그림자가 없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그건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림자가 없다는 건.. 그림자를 만드는 본체가 없다는 거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가진 게 많아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요?
돈 버는 기계, 돈 쓰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요?
온 세상을 다 가져도, 자기 자신이 없다면,
자기 스스로 생각할 줄도 모르고,
자기가 뭘 좋아하는 지도 모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그냥 세상이 하라고 하는 대로,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만 따라서 산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로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사니까 사는가 보다, 남들 다 하니까 그래야 하는가 보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무너지고 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냥 남들 하니까 죽어라고 따라하다가, 어떤 사람은 제풀에 주저앉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달려가다가 벽에 부딪히고, 어떤 사람은 지쳐 쓰러져버리고,
하지만 손에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게 남의 이야기이기만 할까요?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못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1966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사계절의 사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토머스 모어 경이 법정에 서게 됩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리처드라는 젊은이가 증인으로 나와서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위증을 합니다.
그는 거짓 증언의 대가로 웨일즈 지방의 검사장 자리를 얻게 됩니다.
결국 토머스 모어 경은 유죄판결을 받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슬퍼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리처드, 온 세상을 다 얻어도 영혼을 잃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네.
그런데 자네는 영혼을 판 대가가 겨우 웨일즈라니...”
혹시 우리는 우리 영혼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우리 생명을 주고서라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게 고작 세상의 재물이나 사람의 영광은 아닙니까?
영혼보다 내 한 몸 편한 게 더 중요합니까?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못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막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