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개신교 이외의 새로운 여성교육
이러한 상황에 있을 때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은 새로운 회오리 바람을 일게 한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즉 개항과 더불어 새로운 물결이 일기 시작했으니,그것은 곧 신교육에 대한 열망이었다.6)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주적 근대화와 부국강변을 실현하여야 했는데 그 방법은 신지식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그 신지식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근대학교가 나타났다. 이시기에 신교육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된 학교가 원산 학교,동문학,육영공원이다.7)
이 근대학교는 현대식 방식은 빌어 근대교육을 시도한 최초로 학교라고 하겠다. 근대교육을 종래 한문교육에 대한 학교중심의 교육,또는 전통적 유교교육에 대하여 이것을 불식하고 서구의 신문화를 섭취하려는 교육을 말한다.8) 신교육이 시행되기 이전에 전통적인 여성교육과는 다른 의미의 교육의 싹이 트기도 하였다. 물론 전통적인 유교에 바탕한 교육이 아니라 서구의 물결을 탄 신교육이라 해도 여성의 역할을 여전히 가정에 국한시킨 현모양처를 양성하는데 중점을 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여자는 자녀를 낳아 기르며 집안 일을 주관하는 기둥이므로 내외법에 묶여 남자보다 학식이 부족하다면 자녀들의 가정교육에 부족함이 잇을 뿐만 아니라 가사를 관리하는데도 폐단과 미숙함이 많다. 그러므로 여성들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허락하여 자녀 양육과 가정관리에 충실히 함으로써 국가를 더욱 부강하게 할 수 있다."9)
한국천주교회의 초기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여서의 한 예인 유한당 권씨의 [언행실록]은 그 당시의 여성교훈서인 [내훈]이나 [여논어]에 비하여 다른 교육을 그 당시 입교했던 부녀자들에게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언행실록]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교육방침은 서학사상의 영향으로 사회제반 의식이나 교육, 특히 부녀자들의 범절에 있는 매우 형식적이고 외면의 례적인 측면에서 달리해서 내면적인 데 충실하려 했다. 특별히 조선사회의 남존여비의 제도와 관습 및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인 성리학 사상 쳬게에서 어느 정도 달리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언행실록]내용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신적 특성은 본래 창조주에게서 받은 인격체로서의 여성의식을 강조하고 있는 점과 모든 여성들이 실행해야 하는 예의범절의 뜻과 의미를 내면적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0)
또한 동학에서도 최시형이 동학부녀들의 실천적 규범으로서 [내칙]과 [내수도문]을 지어 전국 도인가에서 실현하게 한 것은 동학인으로 하여금 부인의 인격을 새로 인식케하는 새로운 교육의 계기를 만든 것이다. 내칙과 내수도문은 전래의 태교와 부녀의 실천 규범들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사인여천의 인간존엄사상은 육축으로부터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까지도 한울님의 조화 아닌 것이 없다는 범신관적 자연 애호사상을 통하여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었다.11)
이러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한 인간이라는 사상에 기초한 여성교육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여학교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초기 기독교의 여성교육열은 선교의 가장 효과적인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개신교의 여성교육사업이 그 당시 교육사업의 전부였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당시의 관립학교 설립들은 여성교육을 위한 분위기가 점차로 성숙해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독교계 학교의 설립은 이런 분위기 조성을 위한 촉매제가 되었고 여성교육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관립여학교의 설립 상황을 살펴보면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는 1888년 1월 13일자로 고종 황제에게 개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중에서 초.중학교를 설립하여 남녀 6세 이상으로 하여금 모두 취학케 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상소문등이 뒷받침이 되어준 갑오개혁과 1905년의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약 10년간에 형식상으로나마 구교육제도를 폐기하고 근대적 교육제도를 수립하게 되었는데 이 제도도 남성을 위한 것이었지 여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을 의학을 공부하고 7년만에 돌아왔다. 그는 귀국 즉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창간호부터 계속해서 여성교육의 필요성과 여성교육기관의 설립을 종용하였다. 예를 들어 [독립신문]은 1896년 5월 12일자 논설에서 여성도 남성과 같이 교육의 기회를 갖도록 관립학교 설립을 종용하였다.
"정부에서 학교 몇을 지금 시작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나,계집아이 가르치는 학교는 없으니, 정부에서 백성의 자식들을 교육할 때 어찌 남녀가 층등이 있게 하리오.. 불상한 계집아이는 집에 가두어 놓고 가르치는 것은 다만 사나이에게 종노릇할 직무만 가르치니 우리는 그 계집아이들을 위하여 분히 여기노라,정부에서 사나이 아이들을 위하여 학교하나를 세우면, 계집아이들을 위해서 또 하나를 짓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12)
또한 1898년 10월에는 찬양회라고 하는 부인회도 관립여학교 설치를 상소하였고 이러한 노력들이 마침내 주효하여 정부에서는 1899년도 예산에 여학교비 3,750원을 넣고 또 학부는 동년 5월에 여학교 관제 13조를 제정하여 각의에 상정시켰다.
그러나 이 최초의 여학교 설립 청원은 보소파에 의해서 거부당해 실현되지 못하다가 1908년 칙령 제22호로 여성의 중등교육을 위한 고등여학교령을 공포하였다. 정부는 이 영에 의하여 1908년 4월 1일 한성고등여학교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에 어윤적을 임명했다.
이 한성고등여학교의 교육 방침은 "인격 양성은 현모의 손"으로라는 신념이었다. 즉 부덕함양과 솔선수범을 목표로 하고 현모양처를 길러내기에 힘썼고 항상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을 본받을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아직도 여성교육이 독립된 인격체를 기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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