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교회 내에서의 지위
비슷한 시기에 이 요구를 지지하는 성진중앙교회 김춘배 목사의 글이 [기독신보]에 실렸다. "장로회총회에 올리는 말삼"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이 글은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김춘배 목사는 1934년 제23회 총회에 정식으로 제소되었다. 김춘배 목사는 그 당시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때 함남노회에 있는 여전도회에서 여자에게도 장로직을 달라는 운동이 있어 그것이 기독신보에 게재되매 나는 그 운동을 응원하는 뜻에서 그 글을 썼던 것이다. 그때 장로회헌법에 의하면 장로는 남자에 한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같은 규정의 근거는 바울의 서신에 여자에 대한 제재를 가한듯한 성경구절에 있는 것이다. 바울이 '여자는 조용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것은 몇천년전의 한 지방교회에 대한 교훈이요 풍습이지,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라는 뜻으로 썼던 것이다."160)
총회는 이 문제를 위하여 연구위원을 택하였는데 평양신학교의 교수인 나부열,박형룡과 그 외의 몇 사람이 위원이 되어 그 다음회 총회에 연구결과를 보고하게 되었다. 이 보고문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자가 여러 방면으로 교회 일을 협조하며 여러 종류의 교훈하는 것도 정당한 일로 보았으나, 남녀를 총괄하는 성회에 대하여 법적 치권을 가지고 가르치며 치리하는 것만은 남자의 특권에 속하였다는 것이 성경에 가르친 뜻이요,모든 교히가 영구히 인정하여 온 신념"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목사직과 장로직과 기타 안수받아 임직되는 교직은 여자로서 받을 수 없으며 남녀가 공동 집회한 예배석에서는 여자가 가르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성경을 경멸히 여기는 인물들은 ".... 우리 장로교회의 교역자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하자 김춘배 목사가 책임의 중대함을 느끼고 취소한다는 사과문을 냄으로써 문제는 일단락을 맺었다.161)
여자는 교회안에서 교회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결정해서 주어진 영역 안에서만 봉사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어 많은 교파교회가 아직도 여성에게 목사나 장로 안수를 거부하고 교회생정에서 제외시킨다.
감리교의 경우에는 1931년 여목사제도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목사는 교회담임을 계속할 수 없다는 명시를 하였고 또한 교회에서 여자목사를 청빙하지 않는 가부장제적 의식구조 때문에 1955년에야 비로소 최초의 여목사가 탄생되었다. 결국 기독교 문화 자체가 가부장제 문화권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에 교회여성들을 격려하고 키워주는 선봉적인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것이다. 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수준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였다.
보수적인 성경해석과 보수적인 교회제도 안에 갇혀 안주하던 교회여성들이 1920년 이후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사상적인 변화에 잘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참되게 해석된 성경중심의 삶은 내 이웃들에게 아픔을 가져다주는 제반 사회문제에 대9한 관심과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교회여성들은 편협하고 독선적인 자신의 주장만을 계속할 뿐,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대화하는 자세가 아닌 폐쇠적인 면모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발전 일로를 걷지 못했기 때문에 1920,30년대의 사회상황에 충분히 대처해 나가지 못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교회여성들에 대한 비판이 안팎에서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대구남성교회 조선인 긔독신자들이 미국사람선교사를 배척하고 조선사람이 야소교를 독립하여야 하겠다 하야, 독립취지서를 왼조선안각교회에 보낸 일이 잇습니다. 그 취지서에는 이런 말이 잇습니다. '조선에 긔독교회가 성립된 지 수십년에 교회는 다 자급을 하것마는 저미인선교사는 의연히 감독기관으로 처하야 표면즉조선의 예수교라 간판하나 정신즉조선인으로 하여금 미국화케 함이니 차가 종교본지의 위반이 아닌가..." 라는 글을 실은 "평론"에서 홍란은
"이제껏 조선사람이 예수를 밋지안코 저사람들 미국사람을 얼마나만히 미더왓슴니가. 참말로 조선사람의 야소교는 예수를 밋고 그 복음을 실행함에 잇지 안코 선교사인 미국사람을 밋고 그아메리카 정신을 앙모하는 것이 엿슬뿐이외다. 이 폐단은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모조리 아미레카화하게하는 무서운 결과를 이르기커어 왓슴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162)
[동아일보]1926년 11월 3일자 신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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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조선여성으로 반역성 또는 양분성을 가지고 자유자본주의에 중독된 평등을 부르짖게된 동기와 자유를 고찰한다면 기독교와 조선여성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고...소위 선진이라고 떠드는 여성들도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해방이며 중산계급이상 원마한 가정을 말할 뿐이다..."163)
라는비판기사가 실려 있다. 물론 교회여성들도 자신들의 문제를 자각하고 있기는 하였다. 신의주의 김신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독교가 한번 조선사회에 뎐파되자 그 영향이 엇더 하엿슴닛가 제일 첫재로는 서양문물이 소개되며 동양문명에 비하야 특이한 문명을 맛보게 되엇고 그뿐아니라 실제 방면으로 모든 제도나 교육에 여간 새로움을 보게 되엿슴니다."
라고 우선 기독교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을 논하면서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 기독교자신의 사회에 대한 의무도 그것으로 다하엿다고 하지 못하겟슴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기독교인은 오로지 예수를 따라야 하는데 그 예수는 다음과 같은 분이다.
"예수는 약자를 위하야 일하섯고 약자와 함께 울고 우스신 약자의 친구이며 약자의 구주입니다."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는 "이 세상을 위하여 얼마나 일하며 약자들과 함께 얼마나 슬피울며 약자를 위하야 얼마나 일하나 봅시다. 그러나 그 효혐을 현저히 볼 수가 업습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결혼적으로
"녀자문제로 의론이 분분한 조선사회의 녀자로써 붓을 들때에 엇지면 그러케 녀자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업슬가 하고 이상스러히 생각하시는 분도 게시겟스나 다만 민족이 살고 개인이 살냐고 하면 일심당합밧게는 업는 줄로 알고 녀자도 잇는 정성을 다하야 사회와 민족을 위하야 직접간접으로 노력하여야 될 줄로"
생각해서 특별히 구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각은 결국 교회여성 전체를 볼 때 소수의 소리였고 대다수는 선교 초기의 교육방법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차차 사회의 선구자, 지도자의 역할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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