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기독교자료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의 행태와 민중의 고난 2.

Joyfule 2007. 3. 11. 00:58

1. 친일행태

 

이러한 방향전환과 함께 부일협력이 사회문제로 등장한 것은 1936년 미나미지로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부터였다. 이때부터 일제에 의한 친일 단체가 속속 생기게 되었다. 즉 소위 국민정신 작흥운동은 일본의 국체를 인식시킴으로써 신민된 자각을 갖게 하자는 것으로 소위 사회교화의 핵심을 이루는 과제였다. 이 사회교화를 위해서 총독부 학무국 안에 사회교육과를 신설한 미나미 총독은 이들로 하여금 각종의 관련 어용단체들을 조직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러한 흐름에 편승,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이 참여하여 활동한 단체를 대충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방송선전협의회(1937.1.13)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발족시킨 기구로 당시 제2부 방송인 조선어 방송을 통해 조선민중에게 소위 황민화를 위한 일종의 교육강좌를 했다. 여기에 참여한 저명한 여성으로는 부인강좌에 고황경,김활란, 서은숙,송금선,손정규,이숙종 등이 있으며 이때는 중일전쟁전으로 일제의 친일 강요가 심하지는 않던 때였다.


조선부인연구회(1937.1)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생긴 모임으로 신진여성을 동원,생활개선,부인 수양 등을 연구,토의,실천,계몽하는 활동을 했다. 상무이사로 김활란씨가 취임하였다.


애국금차회(1937.8.20)
귀족칭호를 받은 자, 이른바 사회명사들의 처를 중심으로 하여 결성 되었고 금비녀 등을 뽑아 헌납하자는 목적을 가진 여성단체였다. 회장은 악질 귀족 윤덕영의 처 김복유,간사로는 김활란, 송금선,고황경,방신영,손정규,유각경,차사백 등이 보인다. 이외에도 여성단체연합회에서는 부인보국을 주제로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즉 1938년 6월 24일에 종로 기독교청년 회관에서 강연회를 가지고 장내정리비로 일반 10전,학생 5전을 받아서 국방헌금을 했다. 이 강연회의 연사 및 연제는 다음과 같았다.

 

시국과 여성의 각오...유각경(YWCA 총무)
비상시국에 처한 부인 보국...이숙종(성신여교장)
제 미정...임효정(동유회 회장)
보국과 절제...장정심(절제회연합회 총무)
비상시국과 가정경제...황신덕(동아일보 기자)

 

또한 조선부인연구회는 총독부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 양식"이란 것을 제정하였다. (38.9).이를 선전 계몽하기 위해 연구회는 11명으로 된 순회강연반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연사는 송금선,고황경,김활란,이숙종 등이었다.

이들 총후(후방부대)의 부인부대는 다시 41년 12월 27일 조선 임전 보국단 주최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전부인대회"를 개최하였다. 연사로는 박인덕,김활란,모윤숙,박순천,임효정,임숙재,최정희,허화백 등이 나왔다.

 

조선임전보국단은 더 나아가 42년 1월 5일 산하기관으로 소위 총후 부일진영을 망라해서 조선임전보국단부인대를 발족시켰다. 이 부인대의 간부는 다음과 같았다.

 

지도위원 :고황경,김선,김활란,박마리아,박순천,박승호,박은혜,박인덕,배선명,서은숙,

송금선,손정규, 유각경,이숙종,임숙재,임영신,차사백,최이권,황신덕,홍승원.
간사장:임효정.
간 사:김선,최정희,노천명,모윤숙,최희경,허하백.2)

 

기독교여성지도자들 개개인의 변질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일제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 교회는 김종우,유형기 등의 교역자들에 의해서 패배의 장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즉 1938년 4월 25일 서대문경찰서 2층에는 강주희,김명현,김용섭,장정심 등과 일본인 유끼사끼등 일선 각 교회대표자들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신사참배,기타 총후보국 강조주간의 행사에도 참가할 것을 결의한 후,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하여 황도 정신을 발양하겠다는 요지의 선언문까지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