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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의 행태와 민중의 고난 3.

Joyfule 2007. 3. 12. 00:59

1. 친일행태

 

그후 1938년 5월 8일,부민관 대강당에서는 서울 거주 일.선 교도의 일치단결을 도모하는 경성기독교연합회의 발회식이 있었다. "40만 십자군병들아,다같이 일어나 총후보국의 보조를 맞추자"는 슬로건 밑에서 이들은 주악,황거요배,서사제창,성서낭독 등의 식순을 진행한 후 "황국 신민으로서 보국의 성을 치하기를 기함"이라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여성으로서는 기모할란,유각경이 평의원으로 활동한 이 경성기독교연합회의 조직으로 교회 일각이 일제에 굴복해 버리자 지방교회들은 수원읍내 종로 예배당에서 시국인식 좌담회를 개최한 끝에 15원 14전을 거두어 국방헌금하였다.

평양은 동년 5월 23일자 [매일신보]에 중일전쟁 이후 시국좌담회 18회, 전승기원제 161회,국방헌금 836원 56전을 했다는 기록이 보도되었다. 1938년 6월 6일,인천 용강소학교 강당에서 강화,부천을 포함한 인천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되고 이후 각처에서 기독교연합회가 속속 조직되었다.

 

이 지방 기독교연합회를 지부로 하는 상위중앙조직이 1938년 7월 7일에 결성되어 조선기독교연합회로 불리웠다. 장곡천정(현 소공동)공회당에서 열린 이 집회는 전선 각처의 교회대표자들이 참가하여 대회선언문을 채택하였는데 그 내용은 경성기독교연합회의 선언서를 약간 부여한,기독교 황민화,내선일체 체제의 완성이었다.3)

 

더 나아가서 1941년 일제는 각 교파로 하여금 그 고유한 명칭을 버리고 소위 "교단"이라는 일본 교파명을 가지게 하였다. 이에 성결교,안식교 등은 1943년에 자진 해산,폐쇄되었다.4)

 

이때 예를 들어 감리교는 명칭을 혁신교단으로 바꾸었다. 1941년 4월 1일 정춘수 감독은 신교단 규칙을 발표하여 시국에 대응하는 결의를 행하여 일억일심으로 신동아건설에 매진하여 종교보국의 실을 기하려는 결의를 굳게 하였다.5)

 

이에 따라 감리교여선교회 역시 혁신교단 본부의 규칙에 의하여 선교회라는 명칭을 부인회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이 회 안에 일제는 연합여자사업부를 조직하였다. 1941년 5월 15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제1차 대회를 연 연합여자사업부는 지녀야 할 자질 연마와 대동아건설을 담당할 제 2세 국민을 양육하는 주부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을 하였고 황군의 전쟁비축물을 위한 준비를 강조하였다. 여선교회는 또한 각종 위문대를 보내는 사업과,가정부인들을 위한 일어 보급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예를 들면 만주에서는 "전도부인 이베세 씨의 보고에 따라 만주 조선 기독교여전도대의 창립기념으로 규칙통과를 진행하고 감리교 여선교부 주최로 일어보급을 위한 부인 야학을 결의했다."6)는 기록이 있다.

 

1940년 대동아 전쟁이 터지자 황군징집을 위하여 총독부에서는 기독교 여성으로 하여금 징집에 대한 계몽을 시작하게 하였다. 예를 들어 기독교신문 1942년 6월 3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1942년 5월 18일 오후 8시부터 경성인사정 중앙예배당에서 감리교단 경성교구의 주최로 부인 강연회를 열고 징병제 실시에 대한 부인들의 인식을 게몽하였는데...다음과 같은 세분의 강연으로 만당한 청중이 감격중에 성황을 마치었다.

 

징병제 실시와 반도 여성의 각오.
덕화여숙장 영하인덕
일본부녀의 총후보국
총력연맹부인 지도위원 전전절자씨
옛날 부인의 무용담
야담대가 신정언씨."

 

이중에서 박인덕은 "오늘의 반도의 여성은 훌륭한 군인의 어머니나 안해가 될 영광스러운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우리 어머니들은 첫째 우리의 자녀를 건강하게 기르십시다. 우리의 아들은 지금부터 우리 개인의 소유가 아니요 천황폐하의 적자요,국가의 것이니까 아무조록 튼튼하게 길러서 바치십시다..."라고 하면서,그겋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어머니 된 이들 자신이 수양을 하여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충성을 다하고 황국신민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내지 여성들의 정신과 생활을 배우는 데는 국어를 한마디 두마디씩이라고 배우는 것이 또한 길이 됩니다. 말을 배우므로 자연히 일본정신에 이끌려짐을 나 자신의 경험으로 압니다..."라고 역설하였다.7)

 

YWCA나 절제회 같은 기독교여성단체 또한 속속 일제에 굴복하였다. 창설될 당시부터 일제치하에서 일본 Y와의 관게에서 말썽을 일으켰던 YWCA는 창설자들의 끈질긴 주체적인 노력으로 일본 Y의 양해를 얻어 세계 Y에 독립된 회원국으로 가맹하기에 이른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38년 6월부터 Y는 일본 Y에게 폐통합을 강요받았고 Y는 지속적 활동을 위해 대세에 순응하는 자세로서 일본 Y에 정식 가입하였다. 그리하여 명칭을 "일본기독교 여자청년회조선연합회"로 바꾸었다.

 

이런헤 소위 엘리트 여성이라고 하는 지도층 여성이나, 그들이 중심이 된 여성단체들은 쉽게 일본제국주의와 타협하고 극복하는 길을 걸었지만, 사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 중에는 끝까지 항일투쟁을 한 기록들도 있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