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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의 행태와 민중의 고난 4.

Joyfule 2007. 3. 13. 01:04

2. 저항의 역사 - 신사참배 거부사건

 

그러나 이러한 친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최후까지 저항을 한 역사가 있으니 이것이 곧 신사참배 거부사건이라 할 수 있다.

신사참배 강요는 1936년에서 45년간의 황민화 교육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일어났다. 즉 일제는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의식,국민의례라고 주장했고 일부 종교인들도 신사참배가 종교행사가 아니므로 참배의례를 한다는 데 구애받지 말고 우선 학교나 교회를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신사참배의 강요는 먼저 미션스쿨 계통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이에 불응하는 학교는 교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며,그래도 불응할 때는 학교를 아주 폐쇄해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숭실전문학교 교장 맥큔(McCune)은 1936년 1월 20일자로 교장직의 인가를 취소당했으며 숭의여학교는 스누크 교장도 해임되었다. 그러나 안식교회,천주교회,감리교회 등은 쉽게 일제에 굴복하여 그들의 교회,학교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신사참배에 있어서 시종 강경한 태도를 취한 선교부는 남장로교 선교회였으며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로 시국이 긴박해지자 총독부는 시국인식철저에 관한 통첩을 발하고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여 각 학교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불응한 광주의 숭일중학,수피아여중,목포의 영흥중학,정명여중 등 4개교는 폐교를 당했고 순천의 매산학교와 전주의 신흥학교 및 기전여중은 폐교령이 내려지기 전에 자진 폐교하였으며,그뒤 군산영명학교 등 남장로회 선교회의 경영의 10개 학교가 모두 폐교되었다.

 

한편 1937년 10월 29일 평양의 숭실전문,숭실중학,숭실여중 등 세학교도 폐교원을 제출하였으며 그 뒤 대구의 개성,신명,재령의 명신학교,선천의 신성, 보성,강계의 영실학교, 서울의 경신,정신여고 등이 차례료 문을 닫았다.

1938년 2월까지 신사불참배의 이유로 기독교계 학교를 폐교시킨 총독부 당국은 여세를 몰아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할 계획을 세우고 회유와 강압의 악랄한 수단을 썼다. 그리하여 1938년 9월 9일 장로회 총회를 최후로 교회를 굴복시킴으로써 한국교회를 완전히 유린하였다.9)

 

그러나 총회 차원으로는 신사참배를 인정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대항해서 투쟁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이 신사참배 거부사건은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한 이기선 목사와 평안남도 평양 중심의 주기철 목사, 부산과 마산 등 경상남도 중심으로 한상동 목사가 전개하였다.10)

 

이 신사참배 거부사건에는 안이숙,최덕지,김두석 같은 여성들도 또한 참여, 활약하였다. 그중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던 최덕지 전도사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즉,1939년 12월에 밀양 출신 이인재 전도사가 평북,평남 신사불참배운동 현황을 자기가 시무하던 밀양교회에 임시로 시무하는 한상동목사에게 보고한 후,두 사람이 함께 마산의 최덕지 전도사를 만나서 경상남도 신사불참배 운동방법을 의논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1940년 1월 1일 마산 제비산 소재 태매시 선교사 방에 있는 최덕지 전도사를 방문하여 다음 사항을 합의 결정했다.

 

1.신사참배한 현 노회는 해체토록 한다.
2.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세례받지 않는다.
3.신사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산노회를 조직한다.
4.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 원조를 도모한다.
5.신사불참배 그룹 예배를 드리고 동지획득에 주력한다.

 

이렇게 합의를 하고 최덕지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에게 신앙동지로서 협력하기로 약속하고 자신은 경남 일원의 부인,동지 획득에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최덕지 전도사는 1940년 3월 5일에 부산 항서교회에서 열린 경남부인전도회에서 신사불참배자를 새 임원으로 선출하도록 회원들을 만나 설득하는 등의 전략 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그녀는 신사참배는 물론이거니와,신사참배를 안한 자라 해도 궁성요배,동방요배를 한 자는 죄를 지은 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최덕지 전도사의 설득으로 경남 여전도회 회장으로 최덕지 전도사 자신이 선출되고 총무기타 간부 모두 불참배자가 임원으로 당선되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최덕지 전도사는 네 번에 걸친 구속과 많은 고문을 받았고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11) 최덕지 전도사는,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회유와 강요에 못이겨 자신의 신앙에 위배되는 친일의 길을 걸었지만, 단호하게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신앙에 충실했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사건은 종교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지 민족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즉 "그들은 민족이 멸망할 때는 침묵하면서 자기의 교회가 짓밟힐 때면 분연히 궐기,순교했다."12)고 주장한다. 과연 그들은 민족을 교회보다 하위에 속한다고 생각했을까?신사참배 거부 사건에 가담한 최덕지 전도사와 김두석 여사의 예를 살펴보자.

 

우선 최덕지 전도사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의신학교 시절에 철저한 독립정신을 배웠다고 한다. 졸업후 진명유치원에서 어린이들에게 모세를 열심히 가르쳤고 에스터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으며 그 어머니들은 모이게 해서 민족 자주의 정신을 함양시켰다고 한다. 그러녀가 본격적인 독립활동을 벌인 것은 1919년 10월에 통영 애국부인회 서기로 뽑히고 나서였는데 그녀는 이때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위해서 열심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통영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여서 임시정부를 원조하였다고 한다.13) 이러한 것으로 보아 그녀는 신앙의 문제를 민족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생각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비해서 김두석은 처음부터 신앙의 문제를 민족의 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14) 즉 그녀는 "나는 이때까지만 하여도 신앙 문제를 민족사상에까지 결부시키려 하지 않았다."15)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이 둘을 결부시키게 된 계기는 감옥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다 간수에 의해서 독립노래로 오인받은 때였다. 그때의 일은 "무거운 쇠사슬에 묶여 싸늘한 독방에서 지내게 되자...민족적 반항심이 불덩이처럼 솟는다"16)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 계호과정이 "너희들 조선인(조센징)은 놀고 먹기를 좋아하는 게으름쟁이들이야... "라고 욕을 하자 청원작업을 하면서 "첫째는,주의 이름에 욕이 가지 않게끔,둘째는, 신앙의 자유와 민족해방을 얻게 위해"열심히 기도하고 또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다.17)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대한 민족적 차별을 내눈으로 똑똑히 보고, 그 억울한 모습을 느낀 것이 바로 모세가 애굽에서 당하였던 민족감에 애굽인을 처죽인 동족애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빗발같이 쏟아지는 한없는 눈물에서 주여! 우리도 나라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라없는 백성은 불쌍하기도 하옵니다. 이때 비로소 나는 나라없는 백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날까지 믿어온 신앙문제를 민족사상에 회부시켜지 않으려고 가진 애와 기를 써보았지만 이 여러가지 내 눈앞에 당하고 있는 억울한 동족의 쓰라린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의게도 나라가 잇어야 할 필요성과 국가를 형성한 위에 종교의 자유도 필요하다는 것까지 깨달았던 것이다.그리하여 나는 매일매일 1분1초도 쉬지않고 편물 뜨게질을 계속하면서

 

1.우리에게도 나라를 주시옵소서.
2.신앙의 자유를 주시옵소서.
3.일본인의 손에 마자 죽지않게 해주시고
4.나도 큰 민족을 이루어 일본사람들 앞에서 '내로라'하고 살날이 오게 해 주시옵소서.
5.내 나이 30세까지 옥중생활을 끝내게 해주시고 다시는 더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이러한 다섯가지 기도의 제목으로 하늘을 우러러 기도 드렸든 것이다."18)

 

이 두 가지 경우를 볼 때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한 사람들이 민족의 문제는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그것을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한 것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다. 다만 그 생각이 행동으로 표현될 때 신앙적인 것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신앙의 문제만을 생각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신앙이 하나의 개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우리의삶과 연관을 가지는 것이라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살든지 그 시대 그곳에서 당하는 문제들과 유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자리를 떠난 진공상태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 당시 기독교인들도 친일을 그들의 신앙으로 정당화시키든지, 아니면 항일을 그들의 신앙으로 정당화시키든지 양자 택일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신앙과 양심을 버리고 민족을 배반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앙과 민족의 문제를 분리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논리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구체적인 삶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요,허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