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기독교자료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의 행태와 민중의 고난 5.

Joyfule 2007. 3. 14. 00:50

3. 강제연행 및 정신대

 

이때의 사회 전체가 친일로 흘러 지식인,문학인,종교지도자들 거의 모두가 자신들의 안전과 영화를 위하여 친일의 길을 택하고, 또 친일해야 한다는 선전 계몽을 하고 다닐 때, 이 땅의 민중인 여성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억압을 당해야 했다. 그녀들은, 너무도 가난했던 이 땅의 여성들은 단 몇푼의 임금을 준다는 말에 일본 땅으로,일분군대를 위해서 팔려가야 했다.

 

1939년 10월 13일자 홋까이도오의 [오다루]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홋까이도오에 들어온 조선인 노무자들에게 동향여성들의 위안을 각 지방에 조선 요리점을 신설하다..."19)

 

1939년이라면 그해의 7월 4일 일본정부 각의에서 결정한 1939년도 노무동원 실시계획 강령을 통과시킨 해이다.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확대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방침을 정하고(그해의 목표로 85,000명을 징집하기로 하였다) 그것을 실행에 옮겨 그 해의 10월에는 강제연행 제일진을 태운 배가 하꼬다데,무로란,오다루에 계속 입항하고 있었다.20)

남성의 강제연행과 함께 여성의 강제연행 계획도 실제로 행해졌다. 1940년에 호꾸탄 유우바리에 강제연행된 강명봉 씨는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였다고한다.

 

"우리들은 24.5세에 유우바리탄광에 연행되었는데 한달에 한번 놀러가도록 외출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홋까이도오의 탄광이라는 곳은 도로가 산사이에 있는 단 하나뿐이고 역에는 감시원이 있어서 그곳 한곳만 감시하면 꼼짝을 못합니다. 조선 요리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솔직히 말해서 놀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죠. 그 이유는 탄광앞잡이가 된 나쁜 패거리가 조선으로 가서 방적공장등에 취직알선을 한다고 속이고는 17,8세의 여자들을 데려다가 도착한 그날 밤부터 손님을 받게 한 것이죠.우리들은 24.5세의 나이인만큼 여잣애각은 간절했으나 같은 조선인 여자가 그렇게 당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여자들과 같이 놀 기분이 통 생기지 않았습니다..."21)

 

하꼬다데의 벤뗀ㅉ오라는 거리에는 전시중에 조선인 여성이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던 점포가 즐비했으며 그곳에서 도망친 여성들이 빈번히 하꼬다데 산부젼에서 바다에 투신자살을 했다. 즉 하꼬다데 산의 다찌마찌골은 해군의 요새지대가 되어 있어서 낮에는 포대 구속에 숨어있다가 밤에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22)

 

이런 이야기는 하꼬다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사히까와에는 곡사이도오리라고 하는 역시 조선인 여성이 많이 강제 연행되어 와 있던 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일은 홋까이도오뿐만이 아니었다. 가라후또(사할린)에서도 그랬고 찌시마(쿠우릴 열도)에서도 강제 연행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23)

 

1974년 현재 삿뽀로에 살고 있는 정갑수 씨는 1916년에 일보넹 건너와, 1918년 이후 홋까이도오에 와서 가전의 한방약을 팔아 생활한 사람이다. 정씨 기억에 의하면,

"그런 점포가 눈에 띄끼 시작한 것은 '만주사변'이 시작된 때부터라고 생각됩니다. 그당시 도요히라,미나미이찌죠오,스스끼노 근처에 약 20개소 정도가 생겼습니다. 삿뽀로에 가까운 야요히 광산,도요바네 광산,찌도세 광산 등에는 조선인이 많았죠.그때는 아직 감옥식의 합숙소숙소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비교적 자유가 있어서 휴일에는 삿뽀로에 놀러 외출했습니다. 그것을 노리고 '조선 요리점'이 생긴 것이죠. 삿뽀로에는 본시 오오몬도오리에 공인된 유곽이 있었습니다. 조선인 업자가 그 안에서 영업하는 것이 인가되지 않으니까 그밖에다가 점포를 차린 것이죠.도요히라,미나미이찌죠오,스스끼노 근처에 잇달아서 생겼죠.'요리점'이라고는 해도 그것을 간판뿐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조선농촌으로 가서 식량이 떨어진 약점을 노려서 부모에게 촙쌀이나 보리쌀 등을 두세가마니 사서 주고는 잔돈푼 좀 주고 '딸아이를 홋까이도에 데리고 가서 좋은 직업을 알선해주고 돈벌이를 시켜 부모에게 송금하도록 해준다'고 속여 여자들을 홋까이도오에 데리고 와서는 '요리점'에서 일을 시킨 것이죠.이것은 사람고기의 분할판매라고나 할까요. 형편없는 것이죠. 추운 밤에도 밖에 나가서서 손님을 끌어야 하죠.목욕도 제대로 못하니까요 처음의 빚이 10원정도라고해도 금새 몇십원으로 불어나죠.그렇다고 자살하는 사람은 좀체로 없었지만, 도착하자마자 즉시 화류병(성병)에 걸립니다. 그렇게 되면 수은제를 주사하면서 벌이를 시키죠,2,3년 그런 짓을 계속하면 폐인이 됩니다.

 

절대로 도망치는 방법이 없습니다. 도망해서 경찰에 달려가 보아도,순사들은 업자에게 매수되어 한통속이 되어 있으니까 잔뜩 훈계만 해서 점포로 되돌려 보냅니다. 성병이 너무 심해지면 분을 두껍게 발라서 감추고는 지방업자에게 팔아 넘깁니다. 그런 때의 업자끼리의 계약은, 일단 도장만 찍으면 나중에 속아서 병에 걸린 여자를 산 것을 알게 되어도 항의를 못하게 되어 있었죠..(중략)...

 

일본군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게 되자.그렇게 해서 돈푼 번 패거리들 중에서도 세력있는 자들을 협화회가 소개해서 일본군이 관리하는 전쟁태로 데려간 것입니다. 물론 일본인 업자도 갔지요. 이들은 일본군이 점령한 도시에다 점포를 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조선인 업자들은 최전방까지 종군했다는 것입니다. 군에서 모든 편리를 보아 주니까 여자를 5,6명 데리고 가면 돈벌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여자에게는 정말 고된 일이어서,병사들이 주욱 줄서서 기다리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 못된 장사를 해서 번 돈을 번 놈들이 고향에 가서 땅을 사거나 산을 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