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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47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21. 12:02
 
 
꼬마 철학자47  - 알퐁스 도데  
 
  고미다락방 속의 시인

  쌩 제르멩 데 프레 광장의 쌩 제르멩 성당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육층 건물의 지붕 바로 밑에는 손바닥만한 창문이 하나 나 있다. 
  그 밑을 지나칠 때마다 창문을 올려다보면 나는 가슴이 메이곤 한다. 
  그 창문이 달린 방이 바로 자끄 형과 내가 살았던 방이다. 
그 옛날 그 창가에 식탁을 끌어다 놓고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먼 훗날 내가 처량하고 허리 굽은 할아버지가 되어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동정의 미소를 지었던 일이 생각난다.
저 높은 곳에서 어머니 같은 자끄 형과 살 때 쌩 제르멩 종탑의 낡고 커다란 벽시계는
매시간마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게 들려 주었었다. 
젊음과 용기로 가득 찼던 그때의 그 시간들 중 
몇 시간만이라도 또다시 누릴 수 있도록 시간을 되돌려 볼 수는 없을까! 
그때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온 정열을 다해 열심히 시 쓰는 데 몰두했던 시절이었다.
매일 아침 자끄 형과 나는 창문으로 비춰드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자끄 형은 눈 뜨자마자 집안 일을 시작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형은 물을 길어 오고, 방을 청소하고, 책상을 정돈했다.
  "형, 조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형은 웃으면서 단 두 마디로 빗대어 말했다.
  "그런 생각하지 마, 다니엘. 이층에 사는 부인이 또 보면 어쩔려구?"
  그러면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입을 다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형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고 나서 처음 며칠 동안은 
아침 일찍부터 내가 마당으로 물을 길러 내려갔었다. 
다른 시간만 같았더라도 나는 감히 물동이를 들고 내려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인 그 시간에는 모두들 잠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 손에 물동이를 든 내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깨어나면 곧바로 대충 옷을 걸친 채 계단을 뛰어내려가곤 했었다. 
그 시간이면 마당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따금씩 붉은 조끼 차림의 마부가 펌프 근처에서 마구를 씻을 때가 있었다. 
그는 이층에 사는 부인의 마부라고 했다. 
혹시라도 그 마부와 우물 곁에서 마주치게 되는 날이면 난 몹시 거북해 하며 서둘러 행동했다. 
그런 날이면 부끄러워 벌개진 얼굴로 후다닥 펌프질을 해서 
물이 반 정도밖에 차지 않은 물동이를 들고는 뛰다시피 올라오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올라오고 나서는 허둥대던 내 꼴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하지만 다음날, 마당에서 그 마부를 보면 또다시 거북해져 허둥댔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이었다. 
그날따라 다행히도 그 마부가 우물가에 없었다. 
그래서 느긋해진 나는 물동이를 가득 채워 가볍고 유쾌한 기분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그런데 이층 계단을 막 올라왔을 때였다. 
어떤 부인이 바로 내 앞으로 걸어내려오는 것이었다. 
이층에 사는 바로 그 부인이었다. 
우아한 자태로 그녀는 책을 읽으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얼굴빛은 다소 창백했지만 비단 리본을 머리에 단 모습은 아름다와 보였다. 
그녀의 아랫입술 가에 있는 자그마한 하얀 흉터가 눈길을 끌었다. 
내 곁을 지나치려다 그 부인이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채 물이 찰랑대는 물동이를 
여전히 손에 들고 벽에 찰싹 붙어 그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때의 내 모습은 마치 물장수처럼 빗질을 안해 부시시한 머리에 
셔츠 단추는 풀어져 목을 다 드러내 놓은 채 마치 물에 흠뻑 젖은 생쥐 같은 몰골이었다. 
나는 너무나 창피해서 정말 쥐구멍 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부인은 너그러운 여왕처럼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대로 계단을 밟고 내려가 버렸다. 
허겁지겁 방에 올라온 나는 미칠 듯 흥분해서 형에게 그 얘기를 횡설수설 늘어놓았고 
그러한 나를 형은 한참이나 놀려 댔다. 
하지만 다음날 형은 아무 말 없이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러 내려갔다. 
그때부터 형은 매일 아침 손수 물을 떠왔다. 
나는 형에게 말한 것을 후회하며 미안해 했지만 형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층의 그 부인을 또 만날까 봐 너무도 두려웠던 것이다.
집안 일을 끝내면 자끄 형은 후작 댁에 가서 하루종일 받아쓰는 일을 했다. 
형은 이슥한 밤이 돼서야 지쳐 돌아왔다. 
온종일 나는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뮤즈여신과 단둘이서만 보냈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열려 있는 창가에 식탁을 갖다 놓고 앉아 쉬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갔다. 
이따금씩 참새 한 마리가 우리 방 낙수 홈통에 날아와서 물을 마시곤 했다. 
참새는 잠시 뻔뻔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는 
다른 참새들한테 가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참새들이 가냘픈 두 다리로 지붕 위를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낮에는 쌩 제르멩 종탑의 종소리도 여러 번 우리 방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 종소리가 나를 찾아올 때마다 무척 기뻤다. 
우렁찬 종소리는 창문으로 날아들어와 방안을 음악으로 가득 메꿔 주었다. 
이따금씩 아름답고 즐거운 종소리가 16분 음표에 맞춰 노래 부르거나, 
우울하고 구슬픈 종소리가 마치 눈물을 흘리듯 뚝뚝 방안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곧이어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정오 삼종기도 종소리가 들려 오면 태양의 옷을 입은 천사장이 
우리 방으로 들어와서 온 방안을 눈부신 빛으로 가득 채웠다. 
저녁 삼종기도 종소리가 울리면 우울한 천사가 달빛을 타고 내려와서는 
그 큰 날개를 흔들면서 온 방안에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키곤 했다.
뮤즈여신과 참새들 그리고 종소리만이 우리 방을 찾아올 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파리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쌩 브느와 가의 간이식당에 갈 때마다 나는 늘 
다른 손님들과 멀찌감치 떨어진 식탁에 자리잡으려고 신경을 썼다. 
그러고는 접시만 내려다보면서 재빨리 먹어치우곤 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모자를 집어들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가서 실컷 기분을 푸는 일도 없었고 산보를 하는 법도 없었다. 
룩상부르 공원으로 음악을 들으러 가지도 않았다.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그 병적인 수줍음은 
볼품없는 고무장화와 남루한 의복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눈에 띄게 초라한 내 모습 때문에 바깥에 나가는 일이 두렵고 부끄러워 
난 고미다락방에서 결코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씩 파리 특유의 습기 찬 봄날 저녁이면 
나는 간이식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쾌한 모습의 젊은이들과 마주치곤 했다. 
커다란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문 채 연인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 
거들먹대며 걸어가는 그들을 보면 나는 다시 생각을 다잡아 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육층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촛불을 켜고 
자끄 형이 돌아올 때까지 미친 듯 공부에 매달리곤 했다.
형이 돌아오면 방의 분위기가 대번에 바뀌었다. 
노래하고, 웃고, 낮에 있었던 일을 서로 떠들어 댔다. 
소란스럽게 두런거리면서 즐거운 밤을 보내곤 했다.
  "공부 많이 했니? 시는 잘 써지구?"
 형은 이렇게 묻고는 괴짜 후작이 그날 불러 준 이야기를 해주거나, 
날 위해 호주머니에 넣어 온 과자를 꺼내 주고 
그걸 내가 와작와작 씹어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즐거워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책상으로 돌아앉아 시 쓰는 일에 몰두했다. 
방안을 두세 번 여기저기 휘둘러보고는 내가 시 쓰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방을 나가며 말했다.
 "네가 공부하는 동안 난 '거기'나 가서 놀다 올께."
 '거기'란 삐에로뜨 씨의 집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끄 형은 틈나는 대로 삐에로뜨 씨의 집에 찾아가곤 했는데 
나는 첫날부터 형이 왜 그렇게 자주 그 집에 들락거리는지 알아차렸다. 
형은 나가기 전에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넥타이를 서너 번씩이나 고쳐매며 
옷차림에 몹시 신경을 썼는데 그러한 형의 행동을 보고서 모든 걸 짐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형을 거북하게 하지 않으려고 모른 척하며 속으로 웃어 버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