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45 - 알퐁스 도데
그립고 먼 추억의 겨울밤 2
"사전, 넥타이... 음 사전이 또 있네.
아니! 파이프잖아! 너 담배 피우는구나?
아니 또 파이프, 맙소사! 웬 파이프가 이리도 많아?
이 두꺼운 책은 또 뭐냐?
야! 이 '학생징계일지' 꽤 재미있겠는데... 부끄와랑 5백 줄,
수배롤 4백 줄, 부끄와랑 5백 줄, 부끄와랑... 부끄와랑... 이게 사실이냐?
부끄와랑이란 애는 아무도 못 말릴 정도로 심한 말썽꾸러기인가 보구나."
그러더니 갑자기 자끄 형은 놀란 듯이 고함을 쳤다.
"와! 다니엘, 이게 뭐니? 시잖아, 시야! 아직도 시를 쓰는구나?
넌 참 숨기는 것이 많아! 왜 편지엔 그 얘길 하지 않았어?
옛날에는 나도 시를 썼었지.
너 '믿음이여! 믿음이여!'라는 내 시 기억나니? 12편으로 완성하려고 했던 시 말이야.
야! 우리 서정시인 다니엘의 시를 좀 보기로 할까?"
"아! 안 돼, 형! 제발, 그러지마, 정말 대단찮은 거야."
형이 웃으며 말했다.
"시인들은 누구나 다 똑같단 말이야. 자! 여기 앉아서 시를 읽어 주렴.
안 그럼 내가 직접 읽는다. 내 글읽는 솜씨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너도 알고 있겠지?"
형이 막무가내로 날 몰아 붙이는 바람에 난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시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가 싸르랑드 중학교에 있을 때 야외수업 나갔다가
풀밭의 밤나무 밑에서 학생들을 감시하며 지은 시였다.
그 시들이 썩 잘 된 것인지 아니면 시시한 것이었는지 지금은 잘 생각이 안 난다.
다만 난 그 시를 읽었을 때 많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기억날 분이다.
사실, 단 한번도 남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고
게다가 자끄 형은 보통사람과는 달리 어느 정도 시를 아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처음엔 분명히 형에게 우습게 보일 거라고 생각되어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읽어가면서 점점 나는 마치 부드러운 음악과도 같은 내 시에 도취되었으며
목소리도 차분히 안정되어 갔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채 형은 꼼짝도 하지 않고 내 시를 듣고 있었다.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노을이 창문을 붉게 물들였고
건너편 지붕 위에선 고양이 한 마리가 선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형의 표정은 마치 한 편의 비극을 보고 있는 꼬메디 프랑세즈 극장의 지배인같이 몹시 심각해 보였다.
나는 그런 형의 표정을 힐끔힐끔 보면서 내 시를 쉬지 않고 낭송했다.
내가 시를 다 낭송하고 시집을 조용히 덮은 순간,
형이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목에 매달렸다. 뜻밖이었다.
"오! 다니엘! 정말 멋져! 정말 멋진 시야!"
나는 약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형을 쳐다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굉장해! 굉장하다구! 트렁크 안에 이렇게 귀중한 걸 놔두고는 아무 말 않다니!
그럴 수가 있니?"
자끄 형은 입 속으로 무언가를 웅얼웅얼하면서 줄곧 손짓해 가며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주저할 필요가 없겠어, 다니엘. 넌 시인이야,
넌 앞으로 유명한 시인이 될거고, 그 방면으로 네 인생을 설계해야 돼."
"아, 안돼! 그건 정말 힘든 일이야... 특히 데뷔를 하기도... 그때까진 거의 수입이 없거든."
"그까짓것! 내가 두 사람 몫을 벌 테니 걱정할 것 없어."
"그럼 우리가 다시 짓기로 한 우리 집은 어떡하고?"
"집? 내가 책임지지. 내겐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어.
난 그걸 확신해. 넌 우리 집안의 이름을 빛내야 해.
그렇게 되면 부모님께서도 그런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는 데 대해서
얼마나 흐뭇하고 자랑스러워하시겠니!"
그래도 난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하며 형을 말리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형의 열정이 나를 설득시키고 말았다.
결국 나는 슬그머니 형의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속엔 이미 시에 대한 동경이 용솟음치고 있었으며,
평생을 바쳐서라도 라 마르띤느처럼 위대한 시인이 되겠다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형은 계속해서 내가 서른다섯 살이 되기 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들어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나는 형과는 달리 보수적이고 낡은 사고방식으로 가득 찬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그곳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형의 그 의견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했는데 그럴수록 형은 더욱 집요해졌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곳에 들어가야지.
그래서 그 늙은이들의 혈관에 진취적인 새 세대의 젊은 피를 조금씩 집어넣어야 해...
그리고 말이야, 어머니는 또 오죽 기뻐하시겠냐? 그러니 생각을 잘 해보라구!"
어머니를 들먹이며 얘기하자 내 완강한 거부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가엾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도대체 이의를 달 수가 없었다.
별수없이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회원들이 너무 그 유명한 메리메처럼 탈퇴해 버리면 그만이라고 위안했다.
이젠 노을도 다 사라지고 밖은 깜깜했다.
쌩 제르멩 종탑의 종소리가 마치 내가 이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된 것을 축하라도 하려는 것처럼 경쾌하게 울려 왔다.
"자,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마치 아카데미 회원과 동행하는 것처럼
형은 아주 자부심을 느끼면서 나를 쌩 브느와 가의 한 간이식당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자그맣고 초라한 레스토랑이었는데 단골손님들을 위한 식탁 하나가 구석자리에 놓여 있었다.
접시와 수저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낡은 옷을 걸친 가난한 사람들 틈에 끼어 우리는 저녁을 먹었다.
형이 나지막이 말했다.
"거의 대부분이 문인들이야."
형의 그 말에 문인이란 늘상 이렇게 가난해야 하는가를 새삼 느끼며 나는 좀 우울해졌다.
그러나 형의 열정을 식힐까 봐 두려워 내색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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