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8 - 알퐁스 도데
저주스런 전보
7월의 어느 월요일이었다.
그날 나는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술래잡기 놀이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니 보통때보다 훨씬 늦게 되었다.
나는 책가방을 허리에 단단히 차고 모자를 입에 문 채
떼로 광장에서부터 랑떼른느 가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달렸다.
집에 도착해서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층계참에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서 있었다.
평소에 아버지를 몹시 무서워하고 어려워했기 때문에
늦은 데 대한 핑계거리를 찾아 내려고 낑낑대다 이윽고 용감하게 벨을 눌렀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너무 늦었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무의식중에 거짓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를 품안으로 끌어안더니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아버지의 넓고 푸근한 가슴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나는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했졌다.
분명히 호된 꾸중을 들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근심에 싸여 있던 나는
문득 쌩 니지에 성당의 신부님이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와 계신 게 아닌가 생각했다.
신부님을 초대한 날이면 아버지는 절대로 우리들을 야단치지 않았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즉시 깨달았다.
식탁 위에는 아버지와 내 접시만 뎅그마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 엄마는 어디 계세요? 또 자끄 형은 어딜 간 거예요?"
나는 아버지를 올려보며 얼떨결에 큰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는 평상시와 달리 낮게 가라앉은 다정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와 자끄는 형에게 갔단다, 다니엘. 큰형이 몹시 아프다는구나. 그래서...."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본 아버지는 말끝을 흐리더니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쾌활하게 덧붙였다.
"내가 몹시 아프다고 말했나? 다니엘,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구나.
실은 오늘 형이 병석에 누워 있다는 편지가 왔거든. 너도 엄마가 요사이 어떤지 잘 알지?
엄마는 그곳에 가고 싶어 했잖니. 그래서 말이다, 자끄를 딸려 보낸 거야.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야! 자, 이제 앉아서 식사를 하자꾸나.
난 널 기다리느라고 배가 고파 혼났단다."
나는 말없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러나 머리속은 온통 신부인 큰형이 몹시 아프다는 생각으로 꽉 차고 가슴은 터질 듯 메어 왔다.
나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느라 무던히 애를 쓰며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아서 조용히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정말 배고픈 사람처럼 급하게 음식을 입 안에 넣고
씹는 둥 마는 둥 먹고 물도 꿀꺽꿀꺽 소리나게 마셔 댔다.
그렇게 급하게 먹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충격을 받아 멍청해진 나는 식탁 끝에 꼼짝 않고 멀거니 앉아서
큰형이 공장에 와서 들려 주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고인 도랑을 건널 때면
치렁치렁한 신부복을 서슴지 않고 걷어 올리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 온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큰형이 처음으로 미사를 주재하던 때도 생각났다.
부드럽고 정감어린 목소리로 성경귀절을 읽어내리며
미사를 드리는 도중에 큰형이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향해 돌아섰을 때
그 멋진 모습에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했었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홀로 병에 걸린 채 고통 속에 누워 있을 형을 그려 보았다.
'아! 너무 아파!'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로 인해
나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속에 잠겨들었다.
'하나님이 너를 벌하신 거야. 이건 순전히 네 잘못이다!
정직한 행동을 해야 해! 거짓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해!'
하나님이 거짓말한 나를 벌하기 위해서 큰형을 죽게 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고통과 절망으로 중얼댔다.
"이젠 거짓말은 절대로 않겠어요, 앞으로 다시는 학교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서 술래잡기 따위는 하지 않겠어요."
아버지는 식사를 끝내고 램프에 불을 붙여 식당을 밝힌 뒤 일할 준비를 했다.
아버지는 먹다 남은 디저트 접시를 한쪽으로 밀치고 식탁 위에
커다란 장부를 올려놓고는 소리내어 중얼대며 계산하기 시작했다.
바퀴벌레를 잡으라고 사들인 고양이 피네가 식탁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슬픈 듯이 울어 댔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창턱에 팔꿈치를 괴고서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창 밖에는 목을 조르려는 듯 안개가 몰려들고 있었다.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집 문 앞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멀리 로야쓰 요새에서부터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 오고 있었다.
큰형에 대한 생각에 잠겨 망연히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나는 무의식적으로 창문에서 몸을 뗐다.
불현듯 무서운 생각이 든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방금 나를 사로잡았던 불안과 두려움의 전율이 아버지의 얼굴에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아버지도 몹시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왔구나!"
"그냥 앉아 계세요, 아버지. 제가 나가 보겠어요."
나는 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어떤 사람이 문턱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이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전봅니다."
"전보라고요? 무슨 일이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보를 받아 쥐고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발로 문을 못 닫게 힘을 주면서 쌀쌀맞게 말했다.
"서명을 해야지."
서명을 해야 한다고?
나는 전보를 처음 받아 봤기 때문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누구냐, 다니엘?"
아버지가 식당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버지! 거지에요."
나는 여전히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그 남자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손짓하고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게 내 방으로 몰래 들어갔다.
나는 급히 펜을 찾아내 대충 잉크를 찍어서 그 남자에게 돌아갔다.
"여기다 서명을 해라."
그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층계를 밝히고 있는 희미한 램프 불빛을 받으며 떨리는 손으로 서명했다.
그러고는 문을 닫고 전보를 셔츠 속에 감추고 다시 돌아왔다.
아! 그렇다, 불행을 알리는 전보를 셔츠 속에 감춰 버려야만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그 전보가 무섭고 끔찍한 일을 우리에게 전해 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전보는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일까?
무엇이 적혀 있을까?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거지라고?"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며 물었다.
"예, 거지였어요."
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이상히 여길까 봐 다시 창가로 가서 어두운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두려움과 종잡을 수 없는 슬픔에 싸여 전보를 셔츠 속에 묻어둔 채
아무 말 없이 꼼짝 않고 창가에 얼마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그게 아닐 거라고 단정하면서 용기를 가지려고 애썼다.
'네가 뭘 안다고 이 야단이야? 좋은 소식일지도 모르잖아.
아마도 큰형이 다 나았다는 반가운 소식인지도....'
그러나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상상의 나래는 자꾸 불길한 쪽으로만 펼쳐졌다.
이제는 우리에게 닥친 이 불운이 과연 사실일까를
정면으로 부딪쳐 알아 보기 위해 용기를 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무표정하게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식당을 빠져나왔다.
내 방에 들어섰을 때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고는
흥분되어 손을 덜덜 떨면서 서둘러 램프에 불을 켰다.
전보를 꺼내 확 펼쳐 본 순간 아무리 불길한 쪽으로만 상상했다고 할지라도
너무나 엄청난 사실 앞에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야, 이건 진정 사실이 아니야, 단지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야
'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전보를 읽고 또 읽어 보았다.
하지만 그건 한치의 착오도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읽고 또 읽고, 심지어 뒤집어 읽어 보아도 소용없었다.
전보에 쓰여진 그 말은 도저히 다른 말로 바꿔지지 않았다.
전보를 손에 든 채 별짓을 다해 보고 나서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하고 앉아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큰형...."
나는 갑자기 복받쳐오르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어 엉엉 울었다.
너무나 울어 눈이 금방 부어오르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계속 울었다.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려야만 한다고 생각한 나는 방에서 나와
얼굴을 씻고 그 저주스런 전보를 든 채 식당으로 갔다.
나로서는 그 엄청난 사실을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 끔찍한 소식을 알려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무슨 악마가 씌워서 아버지에겐 전보가 왔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으려고 했을까?
어차피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게 될 텐데!
어리석고 좁은 소견 덕분에 내가 직접 아버지에게 이 슬픈 사실을 알려야만 하게 되었으니,
나는 참 멍청하기 이를 데가 없는 놈이야.
차라리 전보가 왔을 때 직접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면
함께 전보를 읽었을 것이고 지금은 아버지도 이미 알고 계실 텐데.'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슬픈 심경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식탁에 가까이 다가가 주저하며 아버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정리하던 장부를 덮고는 펜의 깃털 끝으로
피네의 흰 주둥이를 간지르며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을 보자 내 가슴은 더욱 메어졌다.
아버지는 얼굴에 생기를 띠며 간간히 웃었다.
램프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잘생겨 보였다.
나는 '아버지, 지금은 즐거워할 때가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슬픈 표정을 지은 채 손에 전보를 들고 아버지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아버지가 머리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아버지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아버지가 내 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갑자기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아버지 가슴에서 느닷없이 터져나오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신음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마치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 죽었구나, 그렇지?"
내 손에 들려진 전보가 미끄러져 발치에 떨어졌고, 엉엉 울면서 난 아버지 가슴에 쓰러졌다.
우리는 함께 얼싸안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피네는 발치에서 그 저주스러운 전보를 앞발로 툭툭 치면서 놀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큰형이 하늘나라로 떠난 지도 퍽 오래되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까지도 전보를 받을 때면 언제나 두려움에 떨지 않고는 펴볼 수가 없었다.
'첫째 애 사망. 깊은 애도를'
이라는 말을 다시 또 읽게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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