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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10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5. 9. 13:58
 
 
꼬마 철학자10 - 알퐁스 도데  
 
   빨간수첩2.
   내가 철학반을 끝마치던 18xx년, 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비록 여전히 키가 작고 턱수염 한 올 나지 않아 
   어린애 티를 벗지는 못했으나, 
   철학자나 시인처럼 아주 진지하고 점잖은 소년이었다.
어느날 아침이었다. 
위대한 꼬마 철학자였던 내가 막 학교에 가려고 나서는데 아버지가 나를 가게로 불렀다. 
내가 의아해 가면서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아버지는 아주 화난 듯이 목청을 돋구어 냅다 소리를 질렀다.
  "다니엘, 이제 책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 넌 이제 학교 같은 덴 다닐 수 없어."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버지는 화난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말없이 뒷짐을 지고 가게 안을 왔다갔다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몹시 격앙되어 있는 것 같았고 
나도 역시 갑작스런 일에 깜짝 놀라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흥분이 좀 가라앉은 듯 침묵을 깨고 아버지는 다시 불쑥 말을 꺼냈다.
 "얘야, 너한테 좋지 못한 소식을 알려야겠구나. 아주 나쁜 소식을 말이야... 
우리 가족들 모두가 뿔뿔이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를테면 말이야...."
그순간 갑자기 반쯤 열린 문틈으로 귀청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자끄! 어휴, 저 멍청한 놈 같으니라구!"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고함을 쳤다. 그러고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이 그 빌어먹을 혁명분자들 때문에 망해 버려 어쩔 수 없이 
리용으로 이사온 이후 6년 동안 나는 열심히 일하여 다시 잃어버린 재산을 모아서 
옛날의 안락하고 풍요로운 생활로 되돌아가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악마는 리용에서도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양이다. 
난 식구들을 빚과 가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야 말았어... 
이젠 모든 게 끝장이야. 우린 더이상 헤어나올 수 없는 진흙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어... 
우리는 갈 데까지 다 갔고 이제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이상 까먹기 전에 아직 우리한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가재도구들을 몽땅 팔아서 각자 삶을 찾아야겠다. 
이제 너희들도 클 만큼 컸으니까...."
문틈으로 스며드는 자끄 형의 울음소리가 아버지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아버지는 화조차 내지 않고 내게 문을 닫아 버리라고 손짓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다른 일이 생기기 전까지 네 어머닌 남부지방에 있는 바티스트 삼촌 댁에 가 계실 게다. 
자끄는 그대로 리용에 남게 될 거고... 자끄는 전당포에 조그만 일자리를 얻었지. 
나는 포도주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들어갈 꺼야... 
그리고 얘야, 안됐지만 너도 역시 네 생활비만큼은 직접 벌어야겠구나. 
마침 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교육장으로부터 
자습감독 교사 자리를 하나 얻어 주겠다는 편지가 왔더구나. 자, 읽어 봐라!"
나는 아버지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서는 급하게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 망설이거나 신중하게 생각해 볼 시간조차 없을 것 같아요. 
아주 급한 모양이에요. 갈 채비를 서둘러야겠어요."
  "내일 떠나야 할 거다."
  "좋아요. 떠날께요. 떠나겠어요."
나는 편지를 다시 접어서 아버지에게 돌려 주었다. 
아버지 말대로 난 클 만큼 컸고, 그리고 이제 내 나름으론 아주 심오한 철학자였기 때문에 
내 앞에 펼쳐질 어떤 운명도 헤쳐 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자 우리의 얘기를 다 듣고 있었던 듯 어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으며, 
자끄 형도 어머니 뒤를 따라 쭈뼛쭈뼛 들어왔다. 
두 사람은 내게 다가오더니 아무 말 없이 나를 껴안았다. 
나만 빼놓고 모두가 어제 저녁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애 짐을 잘 꾸려 주구려! 내일 아침 배로 떠나야 될 거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긴 한숨을 몰아쉬었고, 
자끄 형은 소리를 죽이며 흐느꼈다. 
이제 모든 것은 결정되었고 실행만이 남았다.
 그동안 겪어온 숱한 일들로 인해 우리 가족들은 차차 불행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내가 가족들과 헤어지던 그날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날 아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끄 형은 
헤어짐의 아픔을 속으로 삼킨 채 나를 부두까지 배웅해 주었다. 
우연하게도 나는 6년 전 우리 가족을 리용까지 태우고 왔던 바로 그 배를 타게 되었다. 
제니에 선장과 몽떼리마르 주방장도 만났다. 
우리 가족들에겐 무의식적으로 안누 할머니의 큰 우산, 
갑자기 내린 비로 더욱 소란해진 갑판 위의 사람들, 
그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배를 내리던 일, 
그런 여러가지 일들이 떠오른 것 같았다. 
그런 추억들은 우리 가족의 슬픔을 조금은 덜어 주었으며, 
어머니의 입가엔 과거를 회상하는 서글픈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경적이 뿌 뿌 하고 울렸다. 드디어 떠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가족들의 품에서 빠져나와 부교를 건너 갑판으로 올라갔다.
  "조심해라!"
  아버지가 소리쳤다.
  "조심해야 한다. 건강하고...."
  어머니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자끄 형은 이별의 인사를 하려고 입을 달싹거렸으나 너무 울어서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전혀 울지 않았다. 
나는 위대한 꼬마 철학자였으며, 
철학자는 눈물 따위나 흘려 대는 연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슬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희뿌연 안개 속에 남아 슬픔에 싸여 있는 저 다정하고 착한 사람들을 
내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을 위한 일이라면 아무리 위험한 일일지라도 내 몸을 
송두리째 바쳐 가면서까지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다만 나는 위대한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리용을 떠나는 기쁨, 
여행한다는 즐거움 등이 뒤섞여 나를 미묘한 흥분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론 강의 부두 위에 서서 울고 있는 세 명의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슬픔도 잊은 채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세 사람은 철학자도 아니었으며 나와는 달리 야릇한 흥분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그들은 불안해 하면서도 애정어린 표정으로 
마치 천식을 앓듯 뿌뿌거리며 떠나가는 배를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배의 굴뚝에서 솟아나오는 시커먼 연기가 수평선을 날으는 제비만큼이나 작게 보일 정도로 
아득히 멀어질 때까지 그들은 "안녕! 안녕!"하면서 슬픈 목소리를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그들과는 달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휘파람을 불거나, 침을 길게 내뱉거나, 
뱃머리 쪽에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거나, 어깨를 으쓱거리는 등 
어른 흉내를 내며 천천히 갑판 위를 거닐었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이 무척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엔느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에 몽떼리마르 주방장과 주방에서 일을 거들어 주는 
다른 두 사람에게 내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쓰기 위해서 
학교에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중이라고 떠벌려 댔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내가 아주 대견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칭찬을 듣자 나는 더욱 으쓱해지며 나 스스로도 내가 아주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여전히 거드름을 피우며 갑판 위를 거닐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걷다가 나는 그만 실수로 뱃머리 쪽의 경적 옆에 엉켜 있는 
밧줄더미에 발부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6년 전에 무릎 위에 앵무새가 든 새장을 올려놓고 앉아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넋을 잃고 론 강을 바라보았던 바로 그 밧줄더미였다. 
그것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찌나 웃어 댔던지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였다. 
커다란 파란색 새장에 기이하게 생긴 앵무새를 넣고 어딜 가나 들고 다녔으니 
그때의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그때만 해도 불쌍한 꼬마 철학자는 환상의 색깔인 파란색 새장과 
희망의 색깔인 초록색 앵무새를 평생 동안 끌고 다녀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어린시절의 환상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커다란 파란색 새장을 가지고 다닌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장의 파란색은 벗겨져 퇴색되고, 
앵무새의 초록빛 털은 거의 다 빠져 점점 보기 흉하게 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