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주변 사람들 - 결론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었지만 다윗을 단번에 알아보는 영적 안목(眼目)이 있었다(삼상18:1-4절).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다윗에 대한 행태를 본 후 하나님이 아버지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것을 알았다(삼상20:15절).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여 그와 계속 언약을 맺은 이유였다(삼상18:3, 20:16절). 요나단은 벤냐민 지파 출신으로 다윗을 대적해야 할 집안에 속했다. 그러나 다윗을 사랑하고 보호하려 했다.
사무엘서에서 지적하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다윗의 적들은 외부보다 내부에 더 많았다. 다윗을 따른 자들 가운데 악인들과 비류들, 요압 장군 그리고 다윗의 왕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윗과 늘 함께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윗이 누구이며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냥 세상 나라의 왕들처럼 권력자와 성공자로 알고 따랐다.
이 점에서 이들은 솔로몬과 잘 비교된다. 솔로몬은 자신의 출생 배경을 어릴 때부터 들어 잘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해했다. 그가 깨달은 사실은 자신이 전혀 별볼일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그가 출생할 때 하나님이 준 ‘여디디야’란 이름이 잘 증명했다(삼하12:25절).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믿고 하나님이 알려주기까지 믿음을 갖고 인내로 기다렸다. 그의 인내는 열매를 맺었다. 마침내 아버지 다윗의 뜻에 따라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왕상2장). 그러나 그의 형들은 자기 마음대로 다윗이 가진 왕권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며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진실한 믿음은 그 대상을 참으로 사랑하고 믿기 때문에 충분히 기다리도록 돕는다. 그러나 믿음도 둘로 나누어진다. 거짓이 없는 것과 거짓 있는 것(딤전1:5절).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만이 참이다. 사울 왕, 다윗을 따른 비류들, 아버지의 뜻을 무시하며 왕권을 차지하려다 실패한 다윗의 왕자들과 요압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지 믿음을 소유했다. 그러나 이들은 거짓이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다.
왜 그런가? 믿음의 대상인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사랑은 진실한 순종을 낳기 마련이다. 이런 사랑과 믿음이 결여된 이들은 다윗을 세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 또는 순종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들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하나이다.
그리고 이들의 실패에서 나타난 공통점은 불순종의 원인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그리고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 나라를 더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욕심이나 탐심을 버리지 못했다. 이것은 이들의 믿음이 겉으로는 진실하게 보였지만 거짓으로 포장된 이유였다. 그 결과 이들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놓은 후 세상 나라를 택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버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구약 시대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통해 구현되었다.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이면서도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도록 일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을 위하는 일이 세상 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을 부인하면 하나님 나라를 부인하며 세상 나라만 택하게 된다. 하나님의 것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렇게 영생을 누리도록 약속하는 하나님 나라와 점점 더 멀어진다. 불신자들의 사고와 삶의 방법인 이분법(二分法)은 비성경적이며 진실한 신자들에게는 틀린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런 잘못된 이분법에 따라 산다. 이들은 세상을 피하며 사는 신앙 삶이나 세상을 즐기며 사는 신앙 삶, 둘 중 어느 하나를 보여준다. 그 결과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전자는 세상을 피하기만 하기 때문이며 후자는 세상에 파묻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유일한 주권자인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불신자들이나 거짓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은 이 사상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준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함으로 하나님이 받을 영광을 찬탈한다. 이것이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진실한 신자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롬11:36절) 맞는 삶과 윤리를 살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이야말로 거짓 없는 믿음의 증거로 영생에 이르게 한다.
교회 주변에 다양한 신자들이 있다. 양적 성장론자들은 이 모든 이들을 신자들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구약 시대 거짓이 없는 믿음의 눈으로 다윗을 본 무리만 진실한 신자들이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의 구세주와 만물의 주인이 된 예수님에게도 마찬 가지이다. 예수님을 거짓이 없는 믿음의 눈으로 보는 신자들만이 진실하다. 그러므로 믿음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어떤 믿음을 소유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기독교 교회는 잘 가르쳐야 한다.
참으로 성경 기록 방법은 기이하다. 다윗을 따른 무리 가운데 진실한 신자들보다 진실하지 못한 신자들의 기록이 더 많고 길다. 요압이 그 좋은 예이다. 그는 다윗이 고난을 당할 때부터 다윗이 죽기까지 살았다. 이 점에서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스승을 배반한 가롯 유다와 흡사하다.
다윗 주변에 진실한 신자들도 있었다. 밧세바의 전남편인 헷 사람 우리아, 압살롬의 난으로 인해 도망할 때 그를 도와준 신하들인 후새(삼하15-16장),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삼하17:27절) 등등이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요압에 비하면 아주 짧다. 이들은 다윗의 고난 때부터 따랐던 요압과 달리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을 믿음으로 따랐다.
구약 성경의 이런 기록 방식은 신약 시대 출현할 교회에 알곡만 아니라 가라지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을 것임을 예언해 준다. 목회자들도 제직들로서 다윗을 따르던 신하들과 같다. 이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진실한 자들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이 더 많을 수 있음을 구약 성경은 암시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소수의 의인들에 의해 결국 영광스런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수(數)만 강조하는 양적 성장론은 비성경적이다. 목회자를 비롯한 성도들은 거듭난 신자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를 항상 염두에 두고 신앙 삶을 살아야 한다.
구약 성경을 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신약 성경에서 원리적으로 설명된 교리들이 구약 성경에선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잘 설명되기 때문이다. 윤리적 관점이나 상식적인 수준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구약 성경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 때 구속사적인 관점이란 구약 성경의 기록에서 앞으로 올 메시아가 누구이며 무엇을 한 분인지 찾아내려는 자세를 뜻한다. 구약도 전적으로 예수님을 예언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처럼 구약 성경도 모형인 그리스도들을 어떻게 구약 성도들이 믿었느냐에 따라 구원과 생명이 좌우된다고 말한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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