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주변 사람들 - 다윗의 아들들
암논은 다윗의 장자였다(삼하3:2절).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 고난을 당할 때부터 다윗을 따르며 열심히 섬긴 이스르엘 출신 아히노암이 헤브론에서 난 아들이었다. 장자(長者)는 아버지의 능력이며 기력(氣力)의 출발로써 그 영광은 탁월하다(창49:3절). 그런 탁월한 영광을 암논은 출생 때부터 가졌다.
그렇다면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그리고 아버지 다윗을 생각하며 암논은 경건하게 처신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지위와 영광은 때때로 불완전한 인간으로 하여금 조심성 없이 즉 불경건하게 행하게 만든다. 암논은 자기의 이복 동생인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미모가 불러일으킨 욕정 때문에 사랑했다(삼하13:2절).
공식적인 절차를 취했다면 얼마든지 그녀를 정식 부인으로 그는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강압적으로 여동생을 취했다(삼하13:10절). 단순히 정욕을 채울 대상으로 보았다. 한번 불 타기 시작한 욕정은 그를 기다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설사 실수와 잘못을 범했어도 그는 동생 다말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 해야 했다. 그러나 욕심을 채운 후 그는 다말을 몰인정하게 버렸다. 이것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더 나빴다(15-18절).
왜 그랬을까?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자신도 아버지 뒤를 이어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믿음과 신앙이 그에게 전혀 없었다. 늘 아버지 다윗 옆에 가까이 있어 이런 믿음을 얼마든지 공유(共有)할 수 있었지만 그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인 아버지와 그의 왕자라는 사실이 주는 세상 영광과 지위 그리고 명예만 탐함으로 그만 영적 눈을 상실했다. 그 결과 힘으로 자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얻으려는 세상 나라 왕들의 작태를 보였다. 결국 그는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벌거벗은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법치보다 군왕의 덕치를 선택했다.
이 점에서 그는 에서처럼 배고품을 면하려고 장자직분을 팟죽 한 그릇에 판 에서와 같다.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자기 집 터에 감추어져 있음도 모르고 다이아몬드를 구하려 먼 나라로 간 사람과도 같다.
암논은 성욕으로 인해 망하는 과정 중에 있는 목회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왕자라는 신분이 즉 목회자라는 영광스런 신분이 욕정을 자제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껏 채우도록 돕는다. 성직(聖職)에도 이런 위험스런 면은 얼마든지 있다. 이들은 일시적인 성욕에 사로 잡혀 영광스런 소명과 사명 그리고 앞으로 받을 찬란하고도 영원한 상급을 버린 불쌍한 자들이다. 목회자가 자기부정에 남달리 노력해야 할 이유이다.
다윗의 삼남 압살롬에게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여동생 다말의 치욕을 안 그는 참으며 앞으로 복수할 기회를 찾았다. 암논은 다윗에게 사랑을 받는 장남이었 때문이다(22절). 속으로 칼을 품은 체 아무렇지 않게 형 암논을 대했다(삼하13:20절). 같은 집안에 이런 형제들이 함께 살았다. 2년 뒤 압살롬의 집에서 양 털을 깎는 좋은 일이 생겼다. 이 때를 이용하여 압살롬은 왕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했고 이 때 암논을 죽였다(27-29절). 그리고 도망쳐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다(37절).
그는 복수의 화신(化神)이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왕자라는 영광스런 신분도 기꺼이 무시해 버릴 수 있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과 다윗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압살롬의 복수 행위도 믿음의 부족에서 나왔다. 아버지 다윗과 그 사역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처럼 힘으로 악(惡)을 악(惡)으로 갚으려 했다. 아니면 아버지 다윗에게 요청하여 암논이 다말을 정식 부인으로 취하도록 상고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해도 아버지의 인격과 선함을 끝까지 믿고 그는 기다려야 했이다. 자녀로서 가문의 가장(家長)에게 순종해야 했다.
더 나아가 그는 다윗의 하나님이 공의로운 신(神)임을 믿었어야 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기며 자신의 경건에 더욱 힘써야 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생한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늘 복수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다윗 가문의 왕자들끼리 피를 부르는 정말 부끄러운 비극과 불행이 일어나도록 스스로 자청했다. 아버지 다윗과 그를 세운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 점에서 압살롬은 이방 나라의 왕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바른 믿음만이 성도들로 하여금 악을 선(善)으로 갚도록 돕는다. 압살롬에게는 이런 믿음이 없었고 그 결과 실족했다. 아니면 지나친 복수심이 믿음을 저버리게 만들었다. 목회자들 중 자신에게 도전하는 신자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일일이 억압하려 한다. 특히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일수록 그렇다. 자신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그는 사전에 성도들을 양육시킨다. 한국 신자들은 이를 카리스마로 보며 좋아하는데 이런 카리스마는 목회자를 독제자로 만든다. 카리스마가 목회자로 하여금 스스로 멸망의 길를 가도록 만든다.
나중 아버지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하고 복권시켰다(삼하14장).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이용하여 나중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역모(逆謀)하여 정권을 빼앗으려 했다(삼하15장). 이로 보아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양 털 깎는 날 초청한 것도 이런 역모의 의도를 숨겼을 것이다(삼하13:24절).
이런 왕자의 난은 이방인의 왕국에서 자주 목격되는 현상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불경건한 사건이 다윗 집안에서도 발생했다. 그것은 압살롬이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믿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아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믿음만이 이스라엘을 달리 보게 만들고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경건한 삶을 살도록 도울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에게도 이런 불경건이 발견되었다. 다윗이 노년(老年)을 맞았다. 그러나 왕위 계승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만 아도니야를 시험했다. 이 유혹이 심했던 아유는 장남 암논과 삼남 압살롬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남 길르압(또는 다니엘)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인물이거나 또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무능하거나 약한 형이었을 것이다. 아도니야는 자연적 서열에 의해 자신이 왕위의 적합한 계승자라고 스스로 여겼다.
이런 잘못된 판단이 그로 하여금 인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도니야는 늙은 아버지 다윗의 퇴위할 시간이 가까움을 알고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 했다. 이를 위해 스루야의 아들 모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자기 편에 끌어들였다(왕상1:7절). 그리고 자기 집에서 왕위를 선포하기 위해 음식을 마련하고 아버지의 신복들을 초청했다(9절). 결국 실패로 끝났고 그는 아버지 다윗과 다윗의 후임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으로부터 사죄를 받았다(38-53절).
아도니야는 이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영화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목회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성스런 목회는 이 세상에서 존경과 명예와 권세를 누리도록 기회를 준다. 이 때문에 목회자들도 이를 거부하려는 자세와 노력을 항상 견지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목회자는 세상의 명예와 존경과 권세를 달리 본다. 이 세상에선 이런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보며 지금 이곳에서 이것들을 얻으려고 추구하지만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앞으로 얻을 영원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오히려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을 거부한다. 일시적인 것이 영원한 것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 되려는 미련이 아도니야에게 계속 남았다. 이런 숨은 의도가 선왕인 아버지 다윗의 첩으로 미인인 수넴 여인 아비삭을 부인으로 달라는 그의 요청으로 그만 밖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그는 죽임을 당했다. 그의 요청은 동생 솔로몬의 왕위를 여전히 찬탈하려는 음모를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왕상2:22-23절).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발견된다. 아도니야는 장남 암논과 삼남 압살롬의 불경건한 삶과 그들의 결말을 자신의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이들의 죽음은 그에게 가르치는 바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권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만 이방 나라의 왕자들처럼 아버지 왕권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려고 했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욕심은 분별력과 판단력을 앗아간다. 그도 이스라엘과 다윗 왕국이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맡은 사명이 무엇인지 몰랐다. 당시 주변 왕들과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다윗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왕자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그도 매우 즐겼다. 암논이나 압살롬처럼 다윗의 아들들이었지만 아도니야도 아버지 다윗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데 실패했다. 아니면 권력에 대한 욕심이 그의 믿음을 갉아먹었다. 그가 실패한 주요한 원인이며 이유였다.
신약 시대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런 영광에 맞춰 스스로 낮아진 삶을 사는데 실패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스런 신분에 따라 개인 욕심을 탐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도 늘 성공만을 추구하게 만드는 형통 신학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 신학은 치우친 잘못된 가르침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하늘 지혜를 얻는 일에도 실패하게 만든다.
신앙 삶을 살다 보면 주변에서 많은 일들이 생기며 여러 가지 영적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신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형통 신학의 영향으로 이들은 부정적인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 육적으로 아직도 이 세상에서 남아 훈련을 받아야 할 불완전한 존재임을 잊은 결과이다. 이들의 신앙 삶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 확장에 지장을 주거나 방해한다. 이런 신자들도 결국 다윗의 왕자들처럼 실패한 삶을 살 것이다.
다윗의 왕자들은 다윗의 대신들이었다(삼하8:18절).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이들은 가졌다. 목회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신하들이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은 억제할 수 없는 성욕과 복수심(지나친 자존심, 권위 의식) 그리고 권력욕 때문에 스스로 영광스런 기회를 버린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하다. 결국 자기부정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만이 성화(聖化)를 통해 영화(榮華)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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