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주변 사람들
사무엘 상(上)을 자세히 살피면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인물들이 기록된다. 엘가나 가문과 엘리 가문, 엘가나의 아들 사무엘과 엘리의 두 아들들 그리고 다윗과 사울 왕 등등이다. 이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고 그리고 다른 종말을 맞았다.
이 차이는 여호와를 어떻게 경외하느냐 즉 언약의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 여부에 있었다. 이에 대해 사무엘서 자체가 이렇게 증언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절 하반절)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며 원인임을 이 인물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사무엘서는 또 다른 관계를 은근히 강조한다. 그것은 다윗과의 관계였다. 사람들이 다윗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이들의 운명이 달라졌다. 이들 관계를 살핀다면 신약 시대 신앙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구약 시대 다윗과 이스라엘 사이 관계는 신약 시대 부활 전후(前後) 예수님과 교회 사이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다윗이 구약 시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모형(模型)이었다면 예수님은 신약 시대 원형(原型)으로 참 그리스도이다. 시편은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6-12절)
구약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전기(傳記)가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 이유이다. 이 교훈을 위해 다윗의 주변 사람들을 살피고자 한다.
다윗의 주변 사람들 -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
사울은 벤냐민 지파 출신으로 기스의 아들이었다(삼상9:1-2절). 처음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부름을 받을 때 그는 너무나 부끄러워했다(삼상10:22-23절). 이 때 공식적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잠잠했다(삼상10:27절).
얼마 후 사울은 이스라엘을 침략한 암몬 족속을 물리치고 승전(勝戰)했다. 이 때 사울이 어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겠는가 라고 비웃던 사람들을 죽이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삼상11:13절)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울 왕은 변질되었다. 블레셋이 공격하자 다급한 나머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왕인 사울이 직접 하나님께 드렸다(삼상13:8-9절). 그가 이스라엘 왕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13절). 이를 안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13:13-14절)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였다. 외면적으로 사울이 왕이었지만 사실적으로는 하나님이 왕이었다. 그러므로 왕이라 해도 사울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군왕의 덕치(德治)가 아닌 하나님의 법에 근거를 둔 법치(法治)에 철저한 하나님 나라였다. 이 법치를 거부한다면 왕이라도 폐함을 받았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이 후에도 사울 왕은 법치보다 자신에게 의존되는 덕치를 시도했다. 이런 시도는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세상 나라 또는 인간 나라로 만들려는 것과 같았다. 이를 하나님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세워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정면으로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의 불경건한 의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났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는 아말렉을 전멸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는 좋은 목축들을 살렸다(삼상15:8-9절). 그 이유는 백성의 인기를 탐함과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21절). 이를 안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절)
법치를 버리고 덕치를 택한 사울은 완전히 폐함을 받았다. 이 후에 사울은 더욱 더 이스라엘을 자기 개인 가문의 왕국으로 알고 처신했다. 이 때문에 자신보다 더 유능한 다윗이 나타나 백성의 칭찬과 인기를 얻자 그를 죽이려 했다(삼상18:7-9절).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할 목적으로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다. 더 유능한 하나님의 종이 나타난다면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위해 그는 기꺼이 물러날 마음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모를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오히려 변호하며 보호하려 하자 노하며 이렇게 말했다.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삼상20:30-31절)
요나단은 사울의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문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아는 요나단은 끝까지 아버지를 거역했다. 요나단은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불의한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달랐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는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 후 발생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패전했고 함께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겉으로 보아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사이 어떤 차이도 없었다. 외면적인 결과로 의인과 악인 사이를 판단할 수 없는 이유이다. 기복주의 신앙은 이 점에서 잘못이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믿음을 소유한 의인의 죽음이었다면 그의 아버지 사울은 악인의 죽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아들로서 마지막까지 아버지 사울과 함께다.
요나단은 효도로 나타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절)의 소유자로 그 시대의 의인(義人)이었다. 사랑을 버린 믿음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럽기 때문이다(고전13:3절). 여기 사울과 요나단 사이 또 다른 대조가 나타난다. 이들은 같은 가문에 속했지만 다윗에 대한 믿음 여부에 따라 서로 완전히 달라졌다. 다윗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같은 식구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또 다른 교훈이 있다. 불신앙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인간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게 한다. 이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이 점에서 사울은 목회에 성공한 후 교회를 자기의 개인 기업처럼 취급하는 목회자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나님의 부름으로 세움 받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목회에 성공했지만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것으로 착각한다.
사울 왕의 경우처럼 이들도 세상의 명예, 재물 그리고 권세에 대한 탐욕이 거부하지 못한다. 이것이 결국 불신앙의 원인이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 나라를 더 사랑한다. 그리고 구약 시대와 달리 하나님의 심판이 당장 시행되지 않아 더 담대하게 이들은 행동한다. 그러나 앞으로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클지 이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도 참으로 불행이다.
그리고 사울은 그 당시 정권을 잡은 지도자였다. 그가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직접 다윗을 핍박했다. 이것은 참 메시아인 예수님이 자신의 시대 권력을 잡은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과 아울러 동족(同族)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을 예언한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도 포도원으로 상징된 유대 나라를 이미 사유화하는 불경죄를 지었다(마21:33-40절). 이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더 핍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넌더리 나는 현상은 오늘날의 기독교에서도 얼마든지 보여진다. 이를 본 일부의 신자들은 기독교를 탈퇴하고 순수하게 예수님의 제자로서 신앙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오늘의 기독교 교회가 신부의 권위가 지나쳤던 중세 카도릭 교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보여지는 이런 현상은 예수님 재림까지 기독교 교회에서 계속 보여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요나단 같은 의인들이 있다. 이들은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목회자와 그를 따르는 신자들에게 동참하지 않는다. 이들이 교회 안에서도 핍박을 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가 위기를 맞아도 끝까지 교회에 남아 교회를 위해 변함없이 헌신한다. 다 쓰러져 가는 교회를 위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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