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의 비폭력철학
김성수 선생(「함석헌 평전」저자)
1970년 함석헌이 월간지 ꡔ씨알의 소리ꡕ를 창간했을 때나,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위해 활동 할 때,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함석헌은 그를 따르는 씨알들에게 항상 비폭력원칙을 주창했다. 함석헌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을 “사회악과 싸워서 세상을 건질 생각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6) 함석헌은 그의 조국이 사회-정치악에 의해서 전복 당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사회-정치악을 소멸시키려고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기독교관 혹은 종교관을 한국의 극우보수층 기독교인은 “너무 정치적” 이거나 “너무 정치 간섭주의” 신앙관으로 보았다. 반면에, 과격한 재야 측과 소위 운동권에서는 함석헌의 민주화 운동을 위한 비폭력원칙을 “너무 종교적” 이거나 “너무 수동적”인 저항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종류의 폭력사용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올바른 목표뿐만 아니라 올바른 방법이었다, 비록 올바른 방법을 통해서 자신이 실패를 하더라도 함석헌에게 실패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의 철학적 뿌리는 힌두교에서 왔다. 반면에 함석헌의 비폭력철학의 근원은 노자의 평화사상, 퀘이커의 평화주의에서 비롯되었다.
1974년 11월, 함석헌은 윤보선, 김대중과 공동으로 민주회복 국민협의회(민협)를 설립하고 공동의장이 되었다.7) 유신 헌법 선포 후에 야당인 신민당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민협은 사실상 재야에서 집권당인 공화당의 독주에 대항해 야당의 역할을 철저히 수행했다.8) 민협은 또한 도와 시를 포함한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는데, 1975년 3월에 이르러 민협은 전국적으로 50 여 개의 지방본부를 두고 있었다.9)
이 민협에선 “민주시민을 위한 헌장”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요지는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모든 법적, 제도적인 조직기구에 대항해 민주시민은 저항해야할 것을 선포했다. 이 헌장은 민주적 저항운동으로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첫째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세력간의 총단결을 주요 골자로 삼았다.10) 이와 같이 함석헌이 평소 믿던 비폭력철학이 준정치단체에의 행동방침에도 적용된 예가 위와 같은 민협의 경우라 할 수 있다.
1980년대를 통해서, 그의 노익장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남한에 자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전국 공개강연, 공중 집회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85년 인천사태 이후 재야는 크게 급진파와 온건파 양극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석헌은 점차로 과격파 반체제 그룹으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다. 어떤 과격파 반체제 그룹에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로서 폭력과 테러를 바탕으로 한 사회혁명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함석헌은 군사정권에 반대해 민주정부를 수립하고자 활동했지만, 그는 동시에 어떤 종류의 폭력행사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과격파 반체제 그룹과 함석헌과의 갈등은 불가피 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1988년 서울 평화 올림픽 위원장의 자리를 수락하고 평화대회에 참석한 함석헌의 행위는 그와 절친한 안병무로 부터도 "거짓 평화주의자인 노태우 정권에 이용당하는 행동"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평화는 "절대명령" 이었고, 그에게 노태우 정권보다 큰 가치는 대한민국 민족이었고, 대한민국 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세계평화였다. 1980년 모스코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이 절름발이 올림픽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함석헌이 왜 그렇게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평화를 중요시했나 짐작할 만하다.
함석헌이 소망했던 미래는 도덕적인 사회, 도덕적인 국가관계였다. 그것은 개인간의 이타주의뿐 아니라 단체, 종교집단, 국가간의 이타주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제국주의가 판치던 시대에 살았고,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시대 아래서 씨알들은 그들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삶은 억압당했다. 물질주의와 강한 군사력만이 중요시되는 제국주의시대를 살면서 함석헌은 인류문명의 존폐문제를 염려했다. 또한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도 함석헌은 엄중하게 경고를 보냈다:
“사치스런 삶을 위해서 막대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인류에게 전쟁을 초래 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추구가 모든 것의 동기가 되고, 이윤추구를 위해 기업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보다는 더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값비싼 물건을 생산한다. 많은 경우에, 정치 및 경제적 힘의 추구는 인류에게 전쟁을 초래했다.”11)
위와 같은 함석헌의 진술은, 왜 그가 자본주의 가치체제에 대해 회의를 품었는지 그 이유를 반영해준다. 그렇다고 함석헌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좌익과 우익 사이 그 어딘가에 있었다. 함석헌은 또한 국가의 정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전쟁과 폭력을 권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국가간의 평화적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질문을 제시했다: “만일 이 국가주의가 그대로 가려면 충돌할 테고 충돌하면 전쟁 날 테고 전쟁한다면 핵무기 밑에서 생명의 종자가 없어질 것이니깐 이걸 건지려면 어떻게 할까?”12)
그는 인류의 새로운 희망은 국가관을 새롭게 가짐으로 써야 가능하다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관의 확립은 과거 인류의 고전철학을 재해석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고대인들이 현대인들보다 순수하고 때묻지 않았기 때문이다.13) 타인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고 개인구원이 아닌 전체 구원을 생각한 함석헌은 급기야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의 구원 없이 인류의 구원이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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