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의 비폭력철학
김성수 선생(「함석헌 평전」저자)
함석헌의 비폭력철학의 뿌리는 모든 생명전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각 사람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씨앗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함석헌이 추구하는 이상형의 사회는 결국 강자와 약자가 서로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사회였다. 그가 초월적인 노장의 평화 사상에 매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활화산을 연상시키지만, 조용히 앉아 화초를 가꾸는 그의 평온한 자태는 우리에게 "수줍은 촌색시"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런 면에서 그는 강약, 냉온이 극명하게 결합된 파라독스의 인물이었다.
조직과 폭력과의 친밀한 관계를 염두에 두어서인지 그의 사상적 행적은 "조직 기피증" 증세 마저 보였다. 그래서인지 최소의 조직을 가진 무교회주의나 퀘이커리즘에 심취하기도 한다. 불살생을 강조하는 힌두이즘에 그가 심취된 것도 이런 면에서 이해할 만하다. 분명히, 오늘날 인간은 조직이나 제도 없이 살아가기가 아주 어렵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경직된 조직이나 제도는 곧 생기에 찬 삶에 못을 박는 것이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서 언제나 조직된 정치권력은 그와 씨알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제도적인 경직된 종교는 그와 씨알의 자유 분방한 정신 활동에 속박과 억제를 가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조직이나 제도는 작을수록 이상적이라 여겼다.14) 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첨예한 조직가라기 보다는 자유 분방한 사상가였다.15) 함석헌은 종교의 조직화된 힘과 제도화된 권위를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서, 조직화된 힘이나 권력은 잠재적인 폭력의 근원이었다. 그는 일제시대를 통해서 뿐 아니라, 북한 소련군정 하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조직화된 힘과 권력이 얼마나 폭력을 남용하는가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더구나, 이러한 조직적인 권력의 폭력은 소위 ‘자유 대한’ 에서 조차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등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한국인이 체험한 숨막히고 경직된 정치와 역사적 환경 속에서, 함석헌은 평화적이고 초월적인 노장사상이 그의 건강한 영적 생활을 위해 어떠한 공헌을 해 왔는지를 밝혔다:
“이 몇 십 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잘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干道. ꡔ도덕경ꡕ 8장) 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알을 잊어버리고 낙심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침 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無何有之鄕 廣漠之野)에 심어 놓고 그 옆에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ꡔ장자ꡕ, 「逍遙遊」), 이 약육강식과 물량 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16)
함석헌의 비폭력은 무조건적인 혹은 절대적인 비폭력이 아니었다. 그는 때로 "자기방어"를 위한 완력사용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철저하게 절대자의 힘을 믿었지만 동시에 또한 철저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사람 없이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 그였기에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즉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의 구별을 짓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땅에서 메이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요. 땅에서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 이라는 예수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한다.
비록 우리는 오늘도 폭력이 판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함석헌이 추구한 이상적인 세계, 폭력 없는 세계는 인간이 영원히 추구할 가치가 아닐까? 힘이 강하고 우세한 자가 선택을 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힘이 약하고 열등한 자 역시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외모나 두뇌를 선택해서 태어난 인생이 어디 있는가? 그런 면에서 모든 인생,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하고 귀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함석헌은 자신이 인도에 태어났으면 힌두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고려시대 한반도에 태어났으면 불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개신교가 막 소개되는 시기에 평안도에 태어났기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된 것뿐이라고 술회했다. 그 말은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그의 신앙고백이다. 그는 기독교인이면서도 탈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바라보고자 시도했다.
그는 종교간의 질시와 미움 그리고 시기심을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여기서 본질로서의 종교와 현상으로서의 종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본질로서의 종교는 변함이 없고 영원하다. 그러나 현상으로서의 종교는 끊임없이 변해야 하고 항상 재해석 되어야한다. 역사를 통해 현상적인 종교는 기득권을 가진 세력에 의해 변화가 거부 되어왔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폭력이 자행되어 왔다. 물론 함석헌이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해야 된다고 본 종교는 현상으로서의 종교다. 이런 면에서 그는 종교개혁가였다. 그러나 역사의 다른 종교개혁가들처럼 그의 삶은 평탄할 수 없었다.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는 흑백논리가 강요되던 20세기였다. 그는 좌익이냐 우익이냐, 적이냐 동지냐, 기독교인이냐, 비기독교인이냐,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등등의 끊임없는 흑백논리를 강요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21세기는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사람, 다양한 문명과 어울려 살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다원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시대다. 나와 입장, 믿음, 문화가 다른 개인 혹은 집단과 싫든 좋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시대가 21세기다. 내가 귀한 만큼 남이 귀하고 내 종교, 내 민족, 내 신념, 내 의견이 소중한 만큼 남의 종교, 남의 민족, 남의 신념, 남의 의견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살았던 함이 추구한 길은 흑백논리를 뛰어넘고 초월한 21세기에 필요한 다원적인 세계였다. 그의 "글쎄요"는 그가 흑도 백도 아닌 모호한 "회색분자"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세계, 미래의 세계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강을 약으로 제하고 악을 선으로 다스리는 길 그것이 곧 함이 보여 준 비폭력의 길이었다. 그런 그를 나는 불의와 부조리로 점철된 시대를 통쾌하게 관통한 "부드러운 직선"으로 표현하고 싶다.
한때 무력으로 유럽의 석권을 꿈꾸었던 나폴레옹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폭력으로 하는 일은 결코 위대한 일이 못 된다"는 말을 남겼다. 함석헌은 결코 무력으로서 세계점령을 꿈꾸어 본적이 없지만 "폭력의 허망함"을 일찍이 꿰뚫어 보았다. 인간 속에 내재한 하느님의 모습을 "본" 그였기에 이런 "하느님" 에게 고문이나 폭력이 자행되는 것은 그로서는 결코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거부"가 그로 하여금 독재자의 폭력에 의해 시달리는 씨알을 위해 맨몸으로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서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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